김정일 최후의 살아남기 전략
‘고난의 행군’하던 김정일,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으로 살길 모색
김정일이
최대의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지난 7월 1일부로 대단위 경제개혁을 단행하고 있는 것. 북한이 경제 되살리기에 나선 것은 경제개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식량난과 경제위기로 하루에도 수십명씩 탈북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혁을 연기한다면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김정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과연 북한이 이런 경제개혁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느냐이다. 만약 어설픈 개혁에 머무르다 흐지부지 된다면 김정일 체제는
붕괴하게 된다고 지난 8월 31일 홍콩의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지는 지적한 바 있다. 50년 넘게 이어온 부자세습의 역사가 종말을 고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여러모로 김정일에게 위기의 시기다.
물가도 임금도 오르고, 인센티브제까지
북한의 돈 가치가 크게 변했다. 각종 물가와 노동자들의 임금이 현실적인 수준으로 조정된 것이다. 가장 두르러진 것은 쌀값. 쌀의 국가 수매가는
종전 80전에서 40원으로 50배 인상됐고, 판매가는 8전에서 44원으로 550배나 인상됐다. 싸게 사서 거의 무상으로 제공하던 것을 비싸게
사는 대신 국가가 어느 정도의 이윤을 남기겠다는 것이다. 쌀 가격의 조정과 더불어 다른 물가도 평균 10배 정도가 뛰었다.
일본 아사히 신문 기자는 평양방문기(8월 26일)에서 4.5원에 팔리던 카스텔라가 45원, 3원에 팔리던 크림빵이 30원으로 평균 10배
올랐다고 전했다. 또 옥류관 냉면도 15원에서 150원으로 인상됐다고 말했다.
환율도 조정됐다. 북일 적십자회담 취재를 위해 북한을 방문한 도쿄 신문 기자는 평양 고려호텔의 환전코너에 미국 달러화, 일본 엔화 등 외화의
환율을 표시하는 전광판이 설치됐다고 기사(8월 18일)에서 밝혔다. 기사에 따르면 1달러=150원, 1엔=1.24원으로 변동됐다. 7월말까지만
해도 북한의 환율은 1달러당 2.15원이었다.
임금도 가격 현실화에 따른 생활비 보전을 위해 대폭 인상됐다. 특히 ‘생산자 우대 원칙’을 적용해 사무직보다는 생산직 근로자들의 임금 오름
폭이 더 컸다. 사무직 종사자는 평균 140원에서 1,200원으로 8.6배, 생산직 종사자는 110원에서 2,000원으로 18배 올랐다.
생산직 중에서도 일이 고될수록 임금이 많았다. 탄부들의 임금은 평균 240원에서 6,000원으로 25배 넘게 책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인센티브제도 도입했다. 생산량 초과 달성분만큼을 생산자들이 나눠갖게 된 것. 조총련계 신문인 조선신보(8월 2일)의 북한농업과학원
콤퓨터중심소장 리용구씨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이 여파로 “최고 수확고를 내겠다며 농민들의 기세가 대단”하다. “나라에서 농민들을 우대해준
데 대해 구체적인 실적으로 보답하겠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의 김삼식 북한실 과장에 따르면 북한주민들은 이런 경제개혁에 그다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 과장은 “국가공급
서비스 분야의 가격폐지에 대해 북한 지도부가 주민들에게 이미 지난 5월 20일에 공표했다고 중국의 대북한 중개상으로부터 들었다”면서 “이
때문에 북한주민들이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곧 북한 지도부가 경제개혁을 오랫동안 준비해왔음을
뜻한다.
이미 지난해 10월
김정일 지시 있었다
북한의 경제개혁은 올해 7월 1일부로 시작됐지만, 이미 작년 가을 김정일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도쿄신문은 지난 8월
18일 김정일이 작년 10월 당과 내각의 경제담당자들에게 노동자 보수제도 변경과 배급제 일부 폐지 등을 공식 지시한 문서를 단독 입수했다고
전했다. 이 문서는 ‘강성대국 건설의 요구에 따라 사회주의 경제의 관리를 개선, 강화하는 것에 대하여’라는 제목이었다.
문서에서 김정일은 “북한의 경제상태가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사회주의 경제관리체계와 질서도 크게 흐트러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경제생활에
너무 무상이 많다”며 배급제의 근본적인 개선을 촉구하는 한편, 상품가격과 생활비의 전면 수정을 지시했다.
김정일의 지시는 2001년 1월 중국방문시 상하이의 변화상에서 받은 충격과 그해 7월 러시아 방문에서 얻은 실패의 교훈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우리 정보당국의 분석이다.
김용술 북한 무역성 부상도 지난 9월 2일 동경 국제포럼 중 ‘북한경제 세미나’에서 이 같은 개혁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음을 밝혔다. 그는
세미나에서 “2년 전부터 각기관과 기업에 자료를 배포했고 그곳의 노동자를 통해서 일반으로 알려지도록 했다”며 앞으로 예상되는 혼선과 혼란에
대해서도 그는 “특별팀을 편성해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지속적인 개혁과
대외개방의 확대만이 살길”
그러나 국내의 개혁만으로 북한의 자력갱생이 완성되지는 못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 8월 19일 ‘최근 북한의
경제개혁, 평가와 과제’라는 보고서를 통해 “빈곤의 악순환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중단 상태의 성장엔진이 정상가동되지 않을 경우, 공급 부족에
따른 높은 물가 불안과 사회 혼란이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대내적으로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해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개방확대와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충실한 역할 이행을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더 많은 경제 지원을 받아내는 것이 과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은행도 지난 8월 22일 ‘북한 경제조치의 의미와 전망’이라는 보고서에서 “북한이 가격제정 권한을 고수하는 한 자원배분의 효율화를 기대하기는
곤란할 것”이라며 “만성적인 물자부족과 사재기, 수요초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보고서 역시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의 확대”만이
살길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김정일의 연해주 방문, 일본과의 정상회담, 남한과 미국에 대한 화해제스처 등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북한은 서해교전에 대한 유감표명과 함께 중단됐던 남북 장관급 회담 개최를 제안해 남북 교류의 물꼬를 텄다. 또 미국에 대해서도 대북특사
파견을 촉구하고 있다. 일본과의 외무장관 회담을 2년만에 재개했고,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방북을 허락하는 등 대외관계에 있어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에도 구 소련시절 건설된 산업시설의 복구와 경제지원을 약속 받았다.
안팎으로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김정일. 전문가들은 그가 이번의 개혁조치를 성공으로 이끌어낼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해프닝으로 끝날지, 죽의 장막을 걷어 낸 중국처럼 얼어붙은 동토에 따뜻한 햇살이 스며들게 될지, 그 추이와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김동옥 기자 aeiou@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