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어리를 신명으로 푸는 것이 품바의 매력”
박동과, 선욱현 두 배우의 ‘각설이 철학’
“일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허어 품바가 잘도 논다”
근 현대사의 억눌린 민중의 한을 걸인들의 걸판진 놀이판으로 풀어왔던 ‘김시라의 품바’ 공연이 올 가을에도 찾아왔다. 9월 29일까지 정동문화예술회관에서
펼쳐지는 이번 공연의 부제는 ‘걸뱅이들의 재판’. 답답한 정치판의 현실을 걸인의 날카롭고 재치 있는 독설로 시원하게 풍자하는 내용이다.
이번 공연에 출연한 3대 품바 박동과(48) 씨와 14대 품바 선욱현(36) 씨는 역대 품바 중 손꼽히는 명장이다. 박씨는 품바 배우 중
유일하게 1,000회의 공연횟수를 보유한 베테랑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기립박수를 받는 스타다. ‘품바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배우’라는
극찬을 받은 선씨는 ‘장화홍련 실종사건’ ‘고추말리기’ ‘악몽’ 등으로 유명한 극작가이기도 하다.
두 배우가 한 무대에서 만난 것은 서로의 장점이 결합하면 톡톡한 상승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는 연출적 계산에 의해서다. 따라서 연륜이 필요한
부분은 박씨가, 신명이 필요한 부분은 선씨가 맡았다. 두 배우 또한 “절묘한 결합”이라며 서로를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다. 선씨는 박씨를
“자기 색깔을 가진, 품바를 제대로 구사하는 몇 안 되는 명배우”라고 평가했다. 박씨 또한, “선욱현의 품바는 지성미로 시대상황을 민감하게
반영하죠. 희극적 해학적 연기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김시라 씨의 ‘베풂의 정신’
일제치하 시대부터 해방, 6.25, 자유당 말기까지를 살다간 각설이 ‘천장근’의 일대기를 그린 품바는 1981년 초연이후, 4,600여
회라는 경이적인 공연횟수로 한국 기네스북에도 오르는 등 많은 기록을 남겼다. ‘품바’란 원래 각설이 타령의 후렴구에 사용되는 일종의 장단
구실을 하는 의성어였다. 일제시대 이후에는 품바가 ‘입방귀’로 불리기도 했다. 기회주의자나 매국노 등 ‘공공의 적’들을 향한 ‘방귀’ 같은
‘해학적 욕설’이라는 의미다.
연극 품바는 김시라의 작품이 전남 무안군 일로면 일로 공화당에서 초연 된 이후 현재는 일반화 됐다. 광주 민주항쟁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시작한 공연은 노동자의 외침, 인권문제, 통일의 꿈, 환경문제 등 시대적 염원을 반영하면서 ‘국민극’으로 발전해 왔다.
품바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베풂’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품바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김시라 씨는 “베푸는 자가 베풂을 받는 자에게 감사드리는
정신을 심고자 했다. 노동 그 자체가 놀이이며, 놀이 그 자체가 삶인 시대, 그리고 한 인권이 만천하의 인권인 시대를 염원하는 정신을 담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선씨는 품바의 매력을 해학과 풍자에서 찾았다. “일반적으로 연극을 평가할 때 ‘감동적이다’ ‘재미있다’고 하지, ‘속을 풀어준다’는 말은
잘 안 쓰잖아요. 하지만, 품바는 ‘속을 풀어준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연극이죠.” 박씨는 품바에 대해 “민족적 한을 승화시키고,
인생에 대한 깨달음과 초월의 사상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미국 공연 때 만난 한 할머니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품바의 의미를 정리했다. 공연이 끝나고 분장실 문 앞에서 박씨를 기다리던 할머니는
꼬깃꼬깃한 지폐 2불을 박씨의 손에 쥐어주었다. 예전에 각설이에게 돈을 주곤 했다는 할머니는 ‘각설이는 빌어먹는 비렁뱅이가 아니다. 세상에
대한 도가 트고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다’며 박씨에게 거듭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매번 새신랑처럼 설렙니다”
각각 1000회 400회의 공연기록을 가진 정도면 품바 연기에 도통할 만도 한데, 두 배우는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김시라 씨의 철학을
배우기 위해 입단한 선씨는 포스터 붙이는 일부터 시작해 조연출을 맡는 등 배우가 되기 전부터 오래간 품바를 지켜 본 입장이다. 선씨가 품바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 김시라 씨는 14대 품바로 선씨를 낙점했다. 품바 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선씨는 극구
사양했지만, “금강산 구경하고 얼마나 좋으냐”는 꼬임에 넘어가 ‘금강산 유람선상 특별 공연’으로 데뷔했다.
선씨는 아직도 첫 공연 때처럼 두렵고 설레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400회 공연을 했는데 100회 넘어가니까 겨우 관객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공연조건이 매회 다르다보니 매번 두렵고 힘듭니다. 전라도 말로 ‘징하다’고 할 수 있죠.” 선씨는 아직도 북소리만 나면 ‘죽을
맛’이다. 하지만, 막상 무대에만 서면 ‘몸이 세포분열을 일으키는 것처럼’ 신명이 난다니 천상 배우다.
박씨는 그동안 타성에 빠진 경험이 없다고 말한다. “창작이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면, 제가 한 예술 작업은 점찍기에 불과합니다. 자만에
빠질 수 없죠. 연극은 결혼식 같아요. 청첩장을 돌리고 관객을 하객처럼 모시고, 작품이라는 젊고 싱싱한 신부를 맞아들이는 결혼식 같죠.
항상 행복하고 벅찬 감정입니다.”
두 배우 모두 자신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부단히 한다. 고수(鼓手)들은 가장 좋은 모니터 요원이기도 하다. 박씨는 아무리 후배라도
자신의 연기에 대한 조언을 아낌없이 듣는다. 선씨는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스스로 모니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직접
주시하는 것은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선씨는 “7살 된 아들이 즐겨보는 비디오 테이프 리스트 중 하나가 제 연습장면이거든요. 피할
수가 없습니다”며 웃는다.
“모란각에서 공연하고 싶다”
품바는 그동안 연극계 일부에서 ‘연극이 아니다’며 폄하되기도 했다. 선씨는 “전남 무안의 지방에서 시작해, 서울에서 20년 넘게 뿌리를
내린 공연으로 품바에 대한 텃새가 심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1988년 품바는 세계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맞았지만 무산된 아픔을
가지고 있다. 유럽에서 초청되어 이미 표가 매진된 상황이었는데 느닷없이 출국 금지가 내려졌다. “아름다운 전통연희극이 많은데 각설이라니,
망신이다”는 것이 외무부의 입장이었다. 근래에는 품바의 정신을 왜곡한 상업적 품바 공연들의 난립도 문제다.
이같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현재 품바는 공연예술의 지평을 넓혔다는 호평을 받으며 공연의 한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김씨는 평생 품바 연기를
하는 것이 바람이라고 밝혔다. “흰머리의 노인이 품바 연기를 하면 나름대로 맛이 있지 않겠어요. 왜 전통무용보면 마지막으로 추는 춤이 가만히
서 있는 춤 아닙니까. 고정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계속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죠. 역동적이진 않지만 존재만으로도 연기를 할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선씨는 북한에서 품바 공연을 펼쳐 보는 것이 꿈이다. “김시라 선생님의 마지막 소원이 북한에서의 공연이었어요. 절도가 넘치는 북한 공연
문화에 자유로운 품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합니다.”
두 배우의 품바에 대한 소망이 이루어진 순간은, 연극과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도, 남북관계도 달라진 때일 것이다. 그때 품바는 또 무엇을
쏟아내고 비판하며 풀까. 역사의 아픔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품바는 새로운 시대적 울분과 염원을 끊임없이 담아낼 것이다. 그리고 풍자 정신과
베풂의 철학이라는 품바의 ‘그릇’은 남북과 시대, 세계를 초월하며 생명력을 자랑할 것임에 틀림없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