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K-리그’, 세 달만에 잊혀진 약속
오심, 경기장 폭력, 언론 장삿속 등으로 텅텅 빈 경기장
2위 안양과 7위 부산의 경기가 열린 9월25일 안양공설운동장.
월드컵의 열기는 어디가고 마치 영화가 끝난 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는 몇몇 사람만 남은 극장처럼 관중석은 썰렁했다. 눈짐작으로도
채 2,000명이 안 돼 보였다.
“한 달 전에 김남일하고 안드레가 싸운 다음부터 사람들이 축구보러 거의 안 와요.” 경기장을 찾은 비산초등학교 4학년 변한준 군은 관중이
줄어든 이유를 나름대로 이렇게 설명했다.
이 어린이의 말에는 선수들에 대한 원망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선수들에게만 전가할 수는 없다. 그 외에도 심판들의 편파 판정과
오심, 승부욕이 지나쳐 경기를 지연시키는 감독, 서포터스들의 빗나간 사랑, 언론의 장삿속 등이 어우러져 프로축구는 세 달만에 불씨를 스스로
꺼뜨려 버렸다. 올해 일정의 3분의 2가량을 소화한 현재, ‘CU@K-리그’라는 약속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끄집어내 다시 한 번 불씨를
살리기에는 너무 늦은 것일까?
“관중 수 지난해 수준보다도 적어”
·이날 경기에서 전반 6분 안양이 첫골을 넣었다. 그러나 함께 기뻐하고 환호해줄 관중이 별로 없었다. 안양 팀을 응원하던 이종태(45·회사원)
씨는 “관중수가 지난해 수준보다도 적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안양에 프로축구단이 생기면서 단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경기장을 찾았다는
축구광. 그는 “학생들 방학이나 직장인들 휴가가 끝났다지만 요즘은 너무 심하다”며 “축구 보는 맛도 없지만 선수들이 축구할 맛도 안 날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또 “이럴 때는 구단이 팬서비스를 해서라도 관중을 끌어 모아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않다”고 구단의 무사안일함을
꼬집었다. 이날 이씨는 티켓을 사면서 영화시사회권을 한 장 받았다. 하지만 시사회는 서울에서 하는 것이었고, 시간도 저녁 8시 30분 프로였다.
직장을 다니는 그로서는 도무지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 그는 “구단이 약을 올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반 20분 안양팀에 페널티킥이 주어졌다. 부산 선수가 핸들링 반칙을 범한 것. 주심이 페널티킥을 선언하는 순간 부산선수들은 일제히 주심에게
달려들어 항의를 해, 관중들을 긴장시켰다. 또 다시 경기지연사태가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술렁임이 관중석에서 일었다. 다행히 부산 선수들이
판정에 승복해 경기지연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심은 관중감소에 치명적
올들어 심판들의 오심이 유난히 많았다. 오심은 경기의 질을 떨어뜨리고 관중의 재미를 빼앗는다. K리그가 시작된 이후 각 구단의 판정 제소로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심판은 5명, 그 중에서도 2명은 올해 남은 모든 경기에 출장 정지를 당했다. 심판 판정과 관련해 불미스러운 일들이
잇따라 일어나자 지난 9월 2일에는 K리그 심판 23명이 축구회관 회의실에 모여 자기반성 결의대회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아 전남-전북의 심판을 봤던 손종덕 주심에게 6경기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가 내려졌다. 전남 신병호의 핸들링 반칙골을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주일 후 다시 전남-전북의 경기에는 당시의 심판판정을 비꼬는 이색 플래카드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전북 서포터스들이 관중석 상단에 ‘도난신고’
플래카드를 내건 것. 플래카드에는 “△도난일자=9월 11일 △도난문건=승점 3점 △장소=광양전용축구장, 심판의 잘못된 판정으로 승점 3점을
도난당했습니다. 혹시 보신 분은 연락바랍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심판의 위신은 그야말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심판들은 전광판 때문에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축구장의 대형 전광판에서 재생화면이 느리게 여러 차례 방송되다 보니 선수와 팬들이
심판보다 기계를 더 신뢰하게 됐다는 것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이와 관련 지난 1998년부터 파울플레이에 대한 재생화면 방송을 절대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기 감독관들이 보고서를 통해 시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대한축구협회는 외국심판을
수입함으로써 심판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하고 있다. 협회는 지난 8월 25일 “늦어도 3라운드가 시작되는 10월 19일까지 외국 심판을 수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골병이 들대로 든 프로축구가 심판을 수입한다고 해서 치유될 거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관중, 선수, 언론, 협회 모두 변해야
이날 안양과 대전하는 부산팀을 응원하기 위해 부산에서 원정 온 서포터스 박종현(21·대학생) 씨는 “언론들이 장삿속으로 월드컵 스타만 키우는
바람에 관중들이 줄어든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월드컵 스타들이 해외진출을 하고 아시안게임 대표로 차출되면서 K리그엔 잘하는 선수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씨는 “부산팀에는 송종국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성용이나 마니치 등 잘하는 선수들이 많다”면서 “우성용은
현재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우 선수를 비중 있게 다루는 언론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월드컵 스타들이 자기 제어를 못하는 점도 문제점으로 꼽혔다. 안양팀의 서포터스 현수진(20·여·대학생) 씨는 “이천수나 김남일, 김병지
등이 실력은 좋지만 한 번씩은 말썽을 일으켰는데, 관중들의 실망이 그 선수들에게 기대했던 것만큼 컸다”고 말했다.
이천수는 자서전 사건으로 이미지가 안 좋아졌고, 김남일은 지난 8월 25일 안양-전남 경기에서 안양의 안드레와 주먹질을 한 전력이 있다.
김병지도 지난 9월 14일 안양-포항 경기에서 안양 뚜따의 약올리는 듯한 골세레모니에 격분해 뚜따의 멱살을 잡아, 집단싸움의 빌미를 제공했다.
현씨는 “서포터스들도 자성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너무 자신의 팀을 사랑하는 나머지 경기장 질서를 어지럽힐 때가 있다는 것이다. 걸핏하면
판정에 항의하며 경기장으로 뛰어들거나 상대팀을 향해 페트병과 휴지 등을 던지는 행위는 고쳐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축구해설가 신문선씨는 축구협회도 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신 씨는 한 일간지 기고를 통해 극언과 월권이 난무하는 축구협회의 현실을 비판했다.
그는 “축구협회가 특정인에 의해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면서 상벌위원회와 기술위원회 등의 정상화를 촉구했다.
김동옥 기자 aeiou@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