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이 아닌 ‘우리’
대기업에 근무하던 잘나가던 엘리트에서 건설업 사장으로 변신했을 때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사업이란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아 얼마 안 있어 부도가 났고 그는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지나온 시간들이 필름처럼 흘러갔고 지금껏 돈만을 좇으며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잘못 살았구나 하는 반성이 들더군요. 너무 옹졸하게 살았어요. 남에게 베푼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원봉사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독거노인 목욕봉사, 농아원 방문, 무료급식 등을 비롯 국제기능올림픽, 세계통과의례페스티발, 서울드럼페스티발, 과천마당극축제 등 문화행사에 참가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6300명 자원봉사자 중 대표 5명에 포함되는 영광도 얻었다.
“월드컵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국가적 잔치에 제가 한몫 했다는 뿌듯함도 컸지만 많은 이들을 만나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였어요.”
나눔의 대가는 행복
그는 D-30 월드컵 행사공연에서 뜻하지 않은 장애를 얻었다. 무리를 했던 탓인지 일을 마치고 난 후 오른쪽 손과 다리에 마비가 왔고 다음날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가보니 뇌경색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흔히 하는 말로 중풍이었다.
“풍을 맞았다는 사실보다 월드컵에 참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컸어요. 집사람이 미쳤다고 하더군요.”
그는 최대한 티를 안내면서 월드컵 봉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했고 곧이어 25일동안 드럼페스티발에 참여하는 등 지금까지 쉴 틈 없이 활동했다. 이제는 조금 불편할 뿐 거의 나았다며 그 이유를 “좋은 일 하면서 열심히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는 솔직히 이런 일이 알려지는 게 싫다고 했다. 마치 대단한 사람인양 비쳐지는 것이 거북하고 공치사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단다. 그래서 사실 기자에게도 이것을 기사화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앞에서는 알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런 건 알려도 된다는 마음에 무례를 범하면서까지 글을 쓴다. 어느 누구도 그가 무엇을 바라고 봉사하는 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는 주변에서 혹시 정치에 뜻이 있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고 했다. 정계에 진출하려는 속셈이 아닌 이상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없다는 의심의 눈초리다. 하지만 그는 “절대 그런 일 없다”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저 좋기 때문에 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비유를 해도 좋을 지 모르겠지만 봉사는 마약과 같아요. 한번 그 느낌을 알고나면 계속 할 수밖에 없죠. 정말 행복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