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통조림이나 생수병, 고양이 사료 등 온갖 종류의 라벨 1만8000개, 시리얼 상자 1579개, 우편 봉투 속지 패턴 800개, 병뚜껑 500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연극무용학과 교수인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을 법한 물건들만을 열성적으로 모아 거대한 컬렉션을 구축해왔다. 그는 왜 그토록 수집에 강박적으로 몰두했을까? 이 책은 그 답에 대한 치열한 사고와 탐색의 결과다.
군림할 왕국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
과거 회상과 수집에 관한 고찰을 오가는 이 독특한 자전적 에세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기도 한 인간의 사소한 습관과 일상의 사물들에 대해 애정 어린 시선을 던지면서 잔잔하지만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가 수집에 몰입하게 된 데는 신체장애와 정신질환을 앓던 누나 신디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누나는 신경증 발작으로 집안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고, 수집은 그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느끼던 소외감과 상처를 달래주었을 뿐만 아니라 공허와 결핍을 채워주었다. 무언가를 모으고 배열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행위는 자신이 군주처럼 군림할 왕국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봐 두려웠던 저자는 뭔가 의미 있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마 소유하고 결합시킴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달래줘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수집에 열중해 온 자신을 분석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집을 떠나 들어간 기숙학교에서도 녹슨 못이나 볼트, 침대 스프링 등 갖가지 쇠붙이를 주워다 광을 내는 저자의 취미는 계속됐다. 한편 극작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결국 그 영향으로 예일대에 입학해 공연예술을 공부하게 됐다. 그가 연극무용학과 교수가 돼 학술적 업적을 쌓기까지는 자료를 모으고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데 집착하는 수집벽이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공포에 맞서는 하나의 수단
열성적인 수집광이 아닌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두는 물건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습관적 수집이라는 행위, 무언가를 모으고 보관하려는 욕망 자체를 탐구할 뿐만 아니라 혼란과 무력감, 외로움에 휩싸였던 한 인간이 긴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과정을 그려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물론 무언가에 깊이 빠져든 ‘덕후’라면 수집에 대한 저자의 섬세하고도 설득력 있는 고찰에 더욱 깊이 공감할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시도한, 별난 수집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정신분석, 수집에 관한 통찰은 강한 자의식, 기묘한 강박, 자기혐오가 깊이 배어 있음에도 재치와 유쾌함을 잃지 않고 있다. 유음어 말장난, 교차 대구, 언어유희를 즐겨 구사하는 가운데 연극 대본처럼 구성한 대화문과 자작시, 수집품 목록, ‘커피 테이블용 점성술 책’과 ‘브레인 테스트’ 같은 소장 도서에서 발췌한 글, 신문에서 오려낸 기사, 행운의 편지 등 기발한 장치를 곳곳에 배치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수집가다운 집념으로 오랜 시간 공들여 이 책을 집필한 저자는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사물일지라도 그것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면 무한한 의미를 지닐 수 있고, 수집이라는 행위는 결국엔 죽기 마련인 인간이라는 덧없는 존재가 죽음의 공포에 맞서는 하나의 수단일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