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조아라 기자] 살인·강간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른 후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사례가 늘면서, 심신미약이 형량 감경에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심신미약을 인정받아 감형된 사례가 나타나자 “만취해 기억이 안 난다”는 핑계가 범죄의 단골 레퍼토리가 된 것처럼, 최근엔 범행 관련 단골 소재로 조현병, 우울증 등의 정신과 병력이 언급되고 있다.
지난달 22일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의자 김성수 씨가 공주 국립법무병원 치료감호소로 보내졌다. 김 씨 측이 수년 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진단서를 경찰에 제출했고, 법원이 김 씨에 대한 감정유치 영장을 발부했기 때문이다. 치료감호소는 심신 장애로 범죄를 저질렀으나 그 장애 때문에 행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람에게 형벌 집행 대신 장애를 치료해 재범을 방지하는 기관이다. 우울증을 주장하고 있는 김 씨는 최장 한 달의 기간 동안 치료감호소에서 머물며 정신 상태를 감정 받게 된다.
일각에서는 김 씨가 심신미약을 인정받아 형량이 가벼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강서구 피시방 살인 사건. 또 심신미약 피의자입니다’라는 제목으로 같은 달 17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글에는 110만명이 동의 의사를 밝혀 역대 최다 기록을 경신했다. 청원인은 “언제까지 우울증, 정신질환, 심신미약, 이런 단어들로 처벌이 약해져야 하는 것인가”라며 “나쁜 마음먹으면 우울증 약 처방받고 함부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심신미약의 이유로 감형되거나 집행유예가 될 수 있으니까”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정신장애 범죄자의 ‘우발적 범죄’는 과거에 비해 증가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오신환 바른미래당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정신장애 범죄자의 범행동기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우발적 동기’의 경우 2013년 1920명에서 2016년 2765명으로 845명 늘었다. 오 의원은 “정신장애 우발적 범죄자의 대다수가 폭행·상해·성폭력 범죄자로, 살인 또한 매년 20명 이상 가해자가 발생해 무고한 피해가 막대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검찰은 보안처분, 치료보호 등의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경찰 등 관계기관과 공조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회적 공분’ 강력범죄 피의자의 공통점
심신미약은 피의자들이 형량을 낮추기 위해 주장하는 단골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살인·살인미수·강간·폭행 등 수많은 사건에서 피의자가 과거 조현병, 우울증 등 정신과 치료 병력이 있다는 내용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사회적 공분을 불러 일으켰던 사건에서도 피의자들이 이 같은 이유를 들어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사례가 많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모 씨의 경우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심신미약 상태를 인정받은 사례 중 하나다. 김 씨는 2016년 5월 서울 강남역 인근 노래방 건물 화장실에서 약 30분간 범행 대상을 기다린 후 화장실에 들어오는 20대 여성을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검찰은 김 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김 씨가 조현병을 앓고 있어 부득이하게 심신미약 상태를 인정한다”며 징역 30년을 확정했다.
초등학생을 유인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살해 후 시신을 훼손·유기한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 김모 양 또한 모든 범행에 대해 “심신미약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이라는 주장을 해왔다. 지난해 7월 열린 재판에서 김 양의 변호인은 “치밀한 사전 계획에 따른 범행이 아니다”라면서 “사체손괴·유기 당시뿐 아니라 살인 범행 때도 심신미약 상태였다. 범행 도구와 장소, 이후 행적 등으로 미뤄볼 때 정확히 어떤 질환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으로 인해 충동·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올해 9월 김 양에 대해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징역 20년을 확정했다.
중학생 딸의 친구에게 수면제가 든 음료를 먹인 뒤 성추행하고 살해해 야산에 유기한 일명 ‘어금니 아빠’ 이영학 씨도 재판 과정에서 심신미약을 내세운 바 있다. 이 씨의 변호인은 지난해 11월 첫 공판에서 “이 씨는 향정신성의약품 과다 복용으로 인한 환각 증세가 있고 망상 증세가 있다. 심신미약 상태에서 저지른 우발적 살해”, “이 씨에게 장애등급이 있고 간질과 치매 증상이 약간 있다”는 내용의 답변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 씨는 재판부에 “무기징역만 피해 달라”며 호소하기도 했다. 1심은 이 씨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했지만, 2심 재판부는 “교화 가능성을 부정해 사형에 처할 정도로는 보이지 않는다”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판단은 엄격히, 양형 영향은 제한해야”
많은 국민들이 심신미약이 범죄에 대한 면죄부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 대해 국민 법 감정과 맞지 않는 판결이 내려진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2008년 경기 안산시 한 교회 화장실에서 8세 아동을 폭행·강간해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피해자의 신체를 심하게 손상시킨 ‘조두순 사건’이다. 재판부는 조두순 씨가 사건 당시 술에 취해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했다며 형량을 감경해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범죄자의 심신미약을 판단하는 기준을 더욱 엄격히 하고, 양형에 미치는 영향을 제한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분위기다. 이에 대해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달 3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심신미약의 경우에 범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의무적으로 형량을 줄이도록 하는 현행 형법이 사법정의 구현에 장애가 되지는 않는지 검토해 달라”며 “검찰은 기소부터 구형까지 심신미약 여부를 좀 더 엄격하게 판단해야 하지 않는지 고려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문무일 검찰총장도 같은 달 2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이번 기회에 심신미약 판단 사유를 좀 더 구체화·단계화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