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인을 찾아서(16)>
손끝으로 빚어내는 달콤한 꽃
일본과자를 한국과자로, 제1호 제과부문 명장 박찬회
단순히 ‘과자’라고 하기엔 모양과 빛깔이
너무도 아름다운 ‘화과자’는 일본 무로마치시대(14∼16세기 중엽) 말기에 중국 당나라에서 우리나라를 거쳐 유입된 당과자와 남만과자가 일본인의
기호에 맞게 발전된 것이다. 특히 중국으로부터 차가 전래된 이후에는 차와 함께 곁들여 먹는 과자로 더욱 사랑받았다. 그런데 일본 전통과자로만
인식돼온 화과자를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오랜 세월 만든 이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제과부문 명장으로 선정된 박찬회(54) 씨가 바로 그다.
계절별로
다양한 모양
복숭아 감 나팔꽃 단풍 파도 학 등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먹 반만한 크기로 축소돼 있다. 실제와 거의 똑같은 빛깔과 세심한 모양이
먹기에 아깝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
박 씨는 그런 화과자를 아무 거리낌없이 푹푹 썰어 차와 함께 내놓았다. “먹지 않고 보기만 하면 의미가 없다”며 눈으로 즐겼으니 이제 맛을
음미해보라는 심산이었다. 찹쌀 앙금 설탕 한천 등이 어우러져 단맛을 내면서도 각기 다른 모양마다 조금씩 다른 맛이 났다. “고구마 계피
유자 밤 헤즐럿 등 재료를 달리 첨가해 취향에 맞게 골라 먹을 수 있도록 개발했다”고 박 씨는 설명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단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당도를 낮추는 대신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설탕을 너무 적게 넣으면 반죽이 안되기 때문에 적당한 선을 찾는
데만도 오랜 연구가 필요했다고 한다.
모양에 대한 연구도 심혈을 기울였다. 늘 주변 사물에 관심을 갖고 직접 사진 찍어 스크랩한다. 꽃도 활짝 핀 것과 몽우리진 것을 따로 구분해
관찰하고 주로 계절에 맞게 모양을 만든다. 가을은 단풍, 감, 국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젊은이들도 좋아하게끔 초콜릿으로 하트모양을
그리기도 한다.
“아무리 고급스럽고 예쁘게 만들어도 대중이 외면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소비자가 좋아하게 만들어야 점점 보급되고 대중화될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날에만 먹는 사치식품으로 여기는 게 싫어서인지 박 씨는 화과자를 전파하는 일에 특히 많은 신경을 쓴다. 그래서
팜플렛에 화과자에 대한 간략한 지식도 적고, 몇 년 전과 똑같은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 화과자를 일본 과자가 아닌 한국의 과자로 정착시키려는
노력이다.
제과업계 신화 김충복 선생도 인정
박 씨가 본격적으로 화과자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97년부터다. 그전에도 자신이 운영하는 제과점에서 소량 판매는 했으나 백화점에서 적극적으로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화과자의 명성을 알고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려다 국내에도 기술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게 됐다.
사실 박 씨는 국제제과경연대회에서 개인부문 2위에 입상하는 등 이미 제과부문의 알아주는 ‘명장’이다. 17세부터 뉴욕제과, 명보제과를 거쳐
제과·제빵 업계의 신화 김충복 선생에게서만 10년간 기술을 배우는 등 30년동안 기술자로 일했다. “더 배워야겠다는 마음에 가게 낼 생각도
안했죠”라는 박 씨는 밤이면 선배들 몰래 재료를 들고 화장실로 가 연습했다. 잠이 모자라면 다음날 지장준다고 선배들이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남몰래 연습한 실력은 드디어 김 선생이 자리를 비웠을 때 케익에 글씨 쓸 일이 생기면서 드러나게 됐다. 글씨는 최고들만 쓸 수 있는 어려운
작업이었고 그때 박 씨가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그 후 박 씨는 선후배는 물론 김 선생에게도 인정받았고 2000년에는 첫 제과부문 1호
명장으로 선정되는 쾌거를 올렸다.
“하지만 아직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게 너무나 많습니다”라는 박 씨는 화과자 분야를 더욱 발전시켜야할 부문으로 선택했다.
젊은층에서도
인기
오래 전부터 있어왔지만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화과자를 확산시켜야겠다는 ‘사명’을 띄고 박 씨는 인천에 공장을 설립했다. 포장만
기계를 이용할 뿐 전과정을 수작업으로 해야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따랐다. 또 비교적 간단한 공정을 거쳐 다량 생산할 수 있는 양과자에 비해
가격경쟁에서도 밀렸다.
“하나하나 세심한 주의와 노력으로 만든 것을 소비자들이 ‘이게 뭔데 왜 이리 비싸?’라며 외면할 때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박 씨의 한국화한 화과자는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고 한번 맛들인 손님들은 계속 찾아와 단골이 됐다. 이제는 명절에 선주문이 밀릴 정도로
호황을 이루고 향유하는 연령층도 넓어져 이번 발렌타인데이에는 없어서 못 팔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화과자의 붐을 일으켰다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는 박 씨는 “만드는 과정은 어렵지만 소비자들이 화과자를 단순한 과자가 아닌 마치 예술작품
대하듯 감탄해 줄 때 매우 뿌듯하다”고 말한다.
화려한 외양으로 시선을 끌었다면 맛에서도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박 씨는 우리 입맛에 맞는 화과자를 계속 개발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또한 박 씨는 “화과자는 당분이 없는 녹차나 홍차, 블랙커피와 먹어야 한다”며 먹는 방법도 당부했다.
아들에게 ‘전수’ 선물할 터
인생의 3분의 2이상을 과자 만드는 일에 쏟아부은 박 씨는 후배 양성에도 힘 쏟고 있다. “우리나라엔 어린 기능공이 없다”는 박 씨는 몇
년 전부터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준비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만 22세 연령 제한이 있는 기능올림픽대회에 참가할 후배들을 지원하고 돕는 일이다.
“기본을 지키면서 꾸준히 한 우물만 파다보면 언젠가는 보답 받는 날이 있습니다. 손쉽게 돈 벌 궁리만 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기술자를 천대하는 사회 분위기도 바뀌어야 합니다.”
박 씨는 군대간 아들이 제대하면 화과자 기술을 전수할 계획이다. “저는 아무 것도 없는 바닥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왔지만 아들은 지금 여기서
시작해도 되니 오히려 좋은 선물을 주는 게 아니냐”는 박 씨는 화과자에 대한 자존심과 애착을 내비쳤다. 또 “남들보다 앞서있다고 자만하지
않고 더욱 고급스럽고 대중적인 화과자를 만들 터”라며 아직 가야할 길이 멀었음을 지적했다. 박 씨의 고집과 정성으로 피어난 ‘꽃’들이 봄빛에
더욱 반짝였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