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으로 내려온 헤파이스토스
서울 불광대장간
박경원·박상범 대장장이 父子
땅 땅 땅 따당 당 당 당
듣고있노라니 가락이 느껴진다. 발장단이 맞춰지고 두들기는 면에 따라 큰소리, 작은소리가 엇갈린다. 시뻘건 쇠가 모양을 갖춰갈 즈음 사내들의
이마에는 땀이 흐른다.
서울에서도 이러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모든 게 기계화됐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가고, 보란 듯 새벽부터 저녁까지 망치질을
한다. 집게를 잡고 있는 대장은 박경원(65) 씨, 메질하는 이는 그의 아들 박상범(35) 씨다.
“그저 내 일이기 때문에”
1970년대 농촌근대화 속에서 대장간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몇몇 명맥을 유지하던 대장간도 근래 싸구려 중국산에 밀려 문을 닫아야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는 관심없다는 듯 본업에만 충실히 50여 년간을 대장장이로 살아온 이가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저 해오던 일이니 죽기 전까지 계속 할 뿐”이라며 못박는다. “사라지는 전통에 대한 사명감” “계승자로서의 자부심” 등의 ‘거창한’ 이유를
대지 않는다. 단지 ‘내 일’이기 때문이란다.
박경원 씨는 6·25동란 후 ‘배고파서’ 대장간에 취직했다. 처음엔 경기도 신갈에 있는 낫 만드는 공장에서 잔심부름을 했고,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대장장이의 첫발을 내디뎠다. 처음 맡은 일은 풀무질. 지금이야 불의 세기를 기계로 조절하지만 당시에는 손잡이를 잡고, 밀고 당기면서
바람을 일으키는 손풀무를 사용했다. 3년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메질을 배웠는데, 모양을 만들고 단단함을 강화시키는 작업으로 열을 가하고 두들기고,
다시 열을 가하고 다시 두들기기를 보통 8번 이상 반복한다. 한번 두들길 때 두 명의 인부가 300대 씩, 총 600번을 내려친다.
“지금이야 이력이 나서 괜찮지만 초기엔 안 아픈 데가 없었지. 물집이 터져 쓰라리는 건 기본이었고 허리, 어깨가 말도 못했어. 불똥이 튀어
화상 입는 건 다반사고.”
자칫하면 구멍이 생기고 너무 오래 달구면 녹을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한번은 너무 피곤해서 깜빡 졸다 10개나 녹아 못쓰게 됐지. 그때 갑자기 휙하고 망치자루가 날라오더니 내 이마에 퍽하니 맞더라고. 어찌나
아프고 눈물이 나던지….”
채석도구 으뜸, 지방 손님도 많아
서럽던 적이 어디 한두번이었겠는가. 박씨는 그럴수록 더 오기를 품고 매진해 남들은 10년도 걸리고 20년도 걸리는 기간을 단 3년만에 끝내고
담금질을 조율하게 됐다. 담금질은 오랜 숙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로 쇠를 불에 달궜다가 찬물에 급랭시키면서 강도와 성질을 조절하는 단계다.
용도에 따라 물에 담그는 시간과 횟수가 달라야 하기 때문에 가장 고난도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담금질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장이 될 수 있는 조건이다. 하지만 쉽게 대장자리가 나지 않자 박씨는 리어카를 개조해 이른바 ‘이동식 대장간’을
개업했다. 처음엔 미심쩍어 하던 손님들이 써본 뒤에는 그의 리어카를 찾느라 온동네를 뒤졌다. 점점 단골은 늘었고 드디어 불광동에 가게를 낼
수 있었다.
“그때는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꼬박 일해도 다 못할 때가 많았지. 멀리 지방에서도 찾아오고 새벽 5시부터 줄을 서는 사람도 있었어.”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불광대장간은 성업중이다. 대장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야 대단한 호황이다. 특히 그가 만드는 채석과
석축 도구는 으뜸이라는 평을 받아 공사장은 물론이고 강원도에서도 사러 오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다음 번엔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어”
단지 “지금까지 해왔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박씨의 대장일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오죽하면 아들에게 남들은 사양사업이라고 말리는 대장장이
가업을 잇게 했을까. 굳이 말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묵묵히 연마하는 모습은 아들 박상범 씨에게 ‘의무’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힘들게 일하는 것이 안쓰러워 잠시 돕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저도 완전한 대장장이가 돼버렸네요.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마음과 마음이 잘 통해서인지 특히 손발이 척척 맞아야하는 대장일에서 박씨 부자가 실수하는 법은 없다. 아버지가 쇠를 이리저리 뒤집으면 아들은
필요한 부분을 제대로 두들긴다. 말도 없이 부자가 쿵딱쿵딱 하면 어느 새 호미 망치 낫 등의 연장이 탄생한다.
“기자양반 오늘 비싼 구경한 거야. 이런 모습을 또 언제 볼 수 있겠어. 다음에 보려면 아마 민속촌에나 가야할 걸.”
너털웃음을 지으며 아버지 박경원 씨가 말하자 이어 아들 박상범 씨도 “맞아요”하며 웃는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왠지 아쉬움이 느껴졌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