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재 의원(민주당·비례대표·재선)
동서화합 위해 일신의 안일 제치고 적극헌신
“우리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은 ‘국민통합형’ 이어야 한다” 강력 주창
부산광역시장 총무처장관
행정자치부장관 두 번에 걸친 국회의원 등등… 이렇게 경력을 손꼽으면 웬만한 사람은 듬직한 60대로 오인하기 쉬우나 이 경력의 주인공 김기재
의원은 57세의, 속된 말로 한참 때의 장년이다.
그와 동갑인 인물은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다. 이 두사람의 만남은 김 의원이 부산광역시장때였고 노 대통령이 재야 변호사로 활동할 때로 소급된다.
40대의 신진기예의 동갑이라는 남다른 인연도 있지만 두사람은 한눈에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의 가슴에 용솟음치는 ‘개혁의지’가 크게 합치
했다고 할까.
그후의 두사람은 관료와 재야운동가라는 비록 다른 길을 걸었으나 서로를 의식, 존경하였다. 그러다가 민주당으로 영합 돼 합류하게 된 것이다.
민주당 영남파로 일컬어진 두 사람은 호흡을 함께 했다. 지역갈등, 특히 영호남의 대치가 민주당과 한나라당으로 양극화되는 데 대한 두사람의
우려는 심각했다. 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부산 시장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 석패
김 최고위원은 자신의 터전인 부산이 반 DJ에서 한나라당 지지로 선회한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DJ에게 부산·경남의 민심을 추스리기 위해
남은 임기동안 공들일 것을 누차 건의한 바 있다. 아울러 당내에서는 정동영 최고위원을 주축으로 일어났던 정풍쇄신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는 당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정풍운동을 둘러 싼 비판이 일자 서슴없이 “아프다고 호소하는데 소리 지르지 말라고 해선 도리가 아니며 근본적인
치유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설파해 논란의 확산을 차단했다.
그의 부산에서의 인기는 96년 15대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 입당, 부산해운대 기장을에서 당선됐고, 98년 6·4지방선거 당시 부산시장선거에서
불공정 경선을 이유로 한나라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해 1.7%라는 근소한 차로 분패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김 의원을 여당인 민주당에서 영입않을리 만무하다 행정자치부장관의 요직에 발탁한 것이다. 이어 최고위원으로 기용됐다.
그는 입버릇처럼 중앙에서 부산을 돕는 ‘파이프·라인’역할을 자임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역량을 발휘해 왔다. 부산 선물거래소, 삼성승용차,
경마장, 신항만 건설등 굵직한 사업들은 그가 중앙무대에서 해결해낸 것들이다.
PK의 노 후보 지지 세력 규합에 큰 공
김 의원은 ‘21세기 새로운 정치 리더십’이라는 칼럼을 통해 그 요건으로 첫째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모든
사회계층에 개방적·민주적이어야 한다. 셋째 개혁적 성향이어야 한다면서 현재 우리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은 이러한 요건을 모두 갖춘 “국민통합형이어야한다”고
주창하고 있다.
김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탄생의 주축역할을 했다. 노 후보 진영에 합류한 후 부산·경남일대에서 맹렬한 득표활동을 벌였으며 특히
불교계의 지지세력을 규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김 의원은 현정부의 각종 정책과 관련, 일부의 ‘급진개혁이 아니냐’는 평가에 대해서 “대통령 후보로 되었을 때와 대통령당선 후, 또 취임후
상당기간에 엄청나게 달라지는 마음의 자세에 스스로 놀라며 또 매사 최선을 다 하려 노력하고있다”는 노 대통령의 말을 인용, 잘 할것으로
믿는다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일례로 ‘이라크전의 파병결의’를 인용한다.
‘개혁’을 둘러 싼 당내 보·혁대결에 대해서는 “모두들 아우르는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도 분열은 금물이라고 조심스레
언급한다.
내년에 있을 총선 출마의 뜻을 굳힌 듯 하지만 동서화합을 위해 몸을 불 사르겠다는 일관된 염원을 실현시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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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및 경력 고려대 경영학과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행정학석사, 동국대 행정학박사 제11회 행정고시합격, 부산광역시장, 총무처장관, 행정자치부장관, 15·16대 국회의원, 부산시지부장, 민주당 최고위원,민주당 상임고문, 국방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