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100주년 기념 간판 꼭 걸 것”
한국 양복사의 뿌리, 종로양복점 3대 지킴이 이경주 사장
서울 종로구 신문로 근우빌딩 2층의 조그만 가게. 지나온 세월의 발자취를
알리는 ‘Since 1916 종로양복점’ 이라고 쓰인 작은 간판이 손님을 맞이한다. ‘가장 오래된 양복점’의 명성을 지닌 이곳, 나지막한
음악 사이로 중년의 남성이 조용히 신문을 보고있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세상 밖 시간을 거슬러 이곳의 시계는 멈춰있는 듯하다. 신문에서
눈을 떼고 가만히 고개를 드는 종로양복점 3대 지킴이 이경주(59) 사장이 서글한 웃음을 짓는다.
실용성이
최고 무기
“요즘 맞춤양복을 입는 사람들은 거의 없죠. 가격이나 유행패턴이나 기성복이 훨씬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거든요. 특히 지금은 여름철이라 하루종일
손님 한 명 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요. 그래도 가끔씩이나마 찾아주는 단골이 있기 때문에 늘 문을 열어둡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꼬박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가게문을 여는 이 사장에게 단골들은 삶의 활력소자 이 일을 계속 하게 만드는
이유다. 단순한 손님이 아닌 인생을 같이 한 친구이자 가족인 것이다.
“20∼30년을 봐온 손님들은 취향과 스타일은 물론 사는 이야기도 속속들이 알죠. 얼굴만 봐도 반가운 사이에요. 대를 이어 찾아오는 손님도
있는데 그 분들은 정말 남 같지 않아요. 친척 같다고 할까요. 유명인사들도 많이 찾아왔지만 오히려 제 기억에 남는 손님들은 그 분들이에요.”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 즐겨 찾았고, 독립운동가 김석원 장군, 이시영 부통령 등 내로라 하는 인사들도 단골이었지만, 종로양복점을 이끌어 온
이는 꾸준히 이곳을 찾아오는 서민들이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종로양복점의 양복을 가장 제대로 입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철학이 편하고 실용적인 옷을 만들자는 거에요. 몸에 딱 맞추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기 편하게 디자인하죠. 칼라도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 유행 타지 않고 꾸준히 입을 수 있게 제작하고요.”
손님이 칭찬해야 진정한 성공작
건축학을 전공한 이 사장은 아버지 이해주(1996년 작고) 선생의 설득에 못 이겨 1968년부터 재단기술을 배웠다. 장남에게는 어려운 가업을
물려주기 꺼려했기 때문에 5남1녀 중 셋째인 이 사장이 ‘선택’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전혀 옷 만드는 일에 관심도, 배워 본 적도 없었던
터라 이 선생은 실수도 많이 하고 시련도 많이 겪어야 했다.
“지금도 처음 가위를 잡았을 때가 생각나요. 연습할 때와 실전은 정말 다르죠. 조금만 가위질을 비뚤게 해도 그 천은 쓸 수 없게 돼요.
심장이 쿵덕쿵덕 뛰고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데 정말이지 못 하겠더라고요.”
힘들게 만든 옷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가는 손님도 있었고, 삿대질하며 항의하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땐 그저 손님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지만 집에 가서는 북받치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야했다.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가게문을 열지만 손님
오는 것이 두려워 안 오길 바란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아버님은 말씀하셨죠. ‘네가 아무리 잘 만들었다고 생각해도 손님이 칭찬하지 않으면 성공한 작품이 아니다’라고요. 그 말씀을
듣고 더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지나니까 손님들도 맘에 들어하는 옷을 만들 수 있었죠. 그런데 30년 이상을 함께 일하는 동안
아버님께는 한번도 칭찬을 듣지 못했어요.”
최초의
한인 양복점
이 선생이 기억하는 아버지, 이해주 선생은 매우 엄격한 분이었다. 손님을 절대로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며 손님이 오면 밥을 먹다가도 뛰어나가
하루종일 굶으면서 일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당연히 아들이었던 이 선생도 굶어가며 일해야 했다.
또한 이해주 선생은 아들에게 “양심적으로 장사할 것”과 “대가 끊어지지 않게 가업을 이을 것”을 당부하면서 이경주 선생에게 대를 이어가는
양복장이로서의 사명감을 새겨주었다. 그러한 이해주 선생의 정신은 이경주 선생의 조부이며, 종로양복점 창단주인 이두용(1942년 작고)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아버님께 들었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매우 부지런하고 진취적인 분’이었다는 거에요. 1900년대 초반 일본에서 양장기술을 배워와 우리나라
최초의 양복점을 열고, 일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시장에서 성공을 이룬 것만 봐도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한국 양복사의 시조인 이두용 선생은 키가 9자나 되는 마네킹에 모닝코트를 입혀 가장행렬을 하는 등 광고홍보에도 탁월한 감각이 있어 사업을
점차 확장시켰다. 개성과 함흥에 지점을 낼 정도로 번창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인 경쟁자들의 시샘을 받아 누명을 쓰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 바로 ‘종로양복점’이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역사’
“아버지의 존함이 서울정도 600주년 기념 타임캡슐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만큼 제가 지키고 있는 이 양복점이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제 시대에서 대가 끊길까봐 매우 걱정됩니다. 의상학을 전공한 딸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강요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가게가 다시 번성해져야 대를 잇고 싶어도 이을 수 있을 텐데, 고민이 많습니다.”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맺은 이 선생은 그러면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창립 100주년 기념 간판은 꼭 걸 것”이라며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속에 절대 놓을 수 없는 가업에 대한 신념이 가득했다.
“사람 얼굴이 제각각 다르듯 체형이 똑같은 사람도 35년을 넘게 일해오면서 한 명도 본 적 없습니다. 때문에 맞춤복이 가장 편할 수밖에
없죠. 유행 디자인을 늘 연구하고, 남성정장 디자인은 기본디자인에서 약간의 변형을 가할 뿐이라 디자인도 뒤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편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찾으시는 분들이 꾸준히 맞춤양복을 찾으시죠. 그 분들이 있는 한 종로양복점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종로의
터주로서, 한국 양복사의 산증인으로서 양복점을 꼭 지킬 겁니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