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 살아있는 전설
반세기 카메라와 생사고락, 120여 편 스틸사진 찍은 작가 백영호
“누군가는
비아냥거리겠지만 난 스틸맨이 누구보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어. 왜냐하면 역사에 남는 것은 결국 스틸이거든. 내가 카메라에 담는
사진들은 단순한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한국 영화사의 기록이야.”
57년간 영화현장에서 스틸사진을 찍어온 백영호(81) 옹. 1942년 사진계에 입문한 후 1947년 윤봉춘 감독 ‘유관순’으로 데뷔, 1958년
이강천 감독 ‘생명’으로 본격적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 영화사의 산증인이자 인생 자체도 영화처럼 살아온 백옹.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S#1 사진과의 인연 그리고 업(業)
백옹이 카메라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일제 치하 일본인이 경영하던 사진관에 우연히 문하생으로 입문하면서다. 3∼4년을 일하면서 그는 웬만한
종류의 카메라를 거뜬히 조작할 수 있게 됐고, 실력도 인정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화여고 교장이 영화 ‘유관순’
촬영현장에 수학여행을 가는데 그곳에서 학생들 사진을 찍어달라는 청탁을 해왔다. 일도 하고 여행도 할 겸 경주로 간 그는 그곳에서 윤봉춘
감독을 만났고, 윤 감독의 부탁으로 현장 사진을 찍게 됐다. 그것이 스틸사진가로서의 첫발이었다.
“당시 스틸이 뭔지도 몰랐지. 그냥 무작정 셔터를 눌러댔어. 내가 정말 ‘아, 이게 스틸이구나’하고 깨닫게 된 것은 그 후로도 한참 뒤였지.”
‘유관순’ 이후 6·25전쟁이 발발했고, 꼬박 5년을 군에서 보낸 뒤 그는 34세의 나이로 다시 사회와 접했다. “친구들은 이미 자리잡고
있는데 나만 직업도 없이 버려졌더라고”하며 당시를 회상한 백옹은 그러나 1958년 인생 최대 전환점을 맞는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할 일 없이 신문을 뒤적이는데 눈에 띄는 광고 하나가 있더라고. 수도영화사 안양촬영소에서 각 부문 영화스텝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지. 이거다 싶어 응모를 했는데 정말 운 좋게도 합격했어.”
간단한 교육을 거쳐 바로 현장에 투입돼 찍은 영화가 문정숙, 김승호 주연의 ‘생명’이다. “너무 힘들게 찍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고
설명한 백옹은 “그래도 그 일을 통해 영화 제목처럼 나도 스틸작가로서 ‘생명’을 얻었다”며 미소지었다.
S#2 잊지 못할 추억과 상처
‘생명’ 이후 백옹은 120여 편의 스틸을 담당했다. ‘낭만열차(1959,박상호감독)’ ‘바보선언(1983 이장호)’ ‘땡볕(1984 하명중)’
‘아래층여자와 위층남자(1992 신승수)’ 등 한국영화의 상당수가 그의 손을 통해 기록됐다. 특히 임권택 감독과는 ‘상록수(1978)’
‘깃발없는 기수(1979)’ ‘만다라(1981)’ ‘안개마을(1982)’ ‘길소뜸(1985)’ 등 10편의 작품을 함께 작업했다.
형제애를 느낄 정도로 각별하게 지낸 배우들도 있는데, 김승호, 박노식, 허장강이 그들이다.
“동년배라 무척 친하게 지냈지. 농도 주고받고 술자리도 같이 하면서 허물없이 지냈어. 집안에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갈 정도였지.”
허장강이 축구 시합도중 심장마비로 타계했을 때 그의 슬픔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가족을 잃은 것과 진배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오랜 세월을 한 분야에서 종사하다보니 그에겐 추억도 많고 상처도 많다. 특히 지금도 눈가를 적시게 만드는 사건이 있다. 바로 국내 영화제작
사상 최대 참사로 꼽히는 1993년 ‘남자 위에 여자’ 헬기 추락사고다.
“그 날 아침, 현장을 가려고 길을 나서는데 카메라에 달린 줌 렌즈가 툭하고 떨어져 깨졌어. 먼 거리 촬영이 불가능하니 헬기에 탑승하지
못한 채 선착장에 있었지. 그때 갑자기 사고가 터졌어.”
당시 사고로 기장을 비롯해 ‘미도영화사’ 대표 이상언, 배우 변영훈, 촬영기사 손현채, 촬영조수 김종만 등 7명이 목숨을 잃었다. 백옹의
충격은 너무도 컸다.
“한달 간 한강다리를 지날 때마다 눈물이 났어. 그들이 물에 잠기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더라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S#3 꺼지지 않는 열정
백옹은 1994년 우희진, 이경영 주연 ‘어린 연인’을 마지막으로 극영화에서 손을 땠다. 그 후로 국방부 영화 ‘아름다운 동행’을 찍었지만
일선에서는 거의 손을 놓았다. 대신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있다. 그동안 모아둔 사진을 스크랩해 한국영화사를 조망하는 자료집을 만드는 일이다.
그 일에 매진한 지 벌써 3년째가 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자료를 정리하고 액자를 만들어. 그 시간이 가장 정신이 맑은 시간이거든.”
잠을 잘 때도 자택에 마련된 작업실에 몸을 누인다. 간절한 마음 때문인지 꼭 찾고싶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 자료의 행방이 꿈에 나타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애써 잠을 깨 벌떡 일어나 그 위치를 더듬는다. 신기하게도 으레 자료는 발견된다.
백옹이 정리한 자료의 일부는 국내영화제는 물론 해외에서도 전시돼 주목받았다. 미국에 80여 점이 보내졌으며, 프랑스, 영국, 독일 등지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00년에는 이탈리아영화제에 16개 작품 64컷의 스틸이 전시돼 큰 호응도 얻었다.
“얼마 전 광주국제영화제 특별전에서 한 외국인이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많은 걸 다 모아 전시하냐고 깜짝 놀라더라고. 자기네 나라에는 이런
게 없다면서. 많이 흐뭇했지. 내가 생각해도 기적이야.”
자신이 죽은 후 자료들이 버려지지 않고 필요한 사람들이 쉽게 찾아 이용할 수 있도록 백옹은 지금 하는 작업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다. 없는
살림에 자비를 털어 하는 수고스런 일이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다.
“내가 하는 작업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하지. 지금 70%정도 완성했기 때문에 난 꼭 최소한 3년은 더 살아야 해. 더 오래
살면 좋고. 허허.”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