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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잊혀진 기억 … 베일 벗은 실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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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사라진 유해 행방 등 남은 진실 밝혀야

1968년 4월 창설된 실미도 북파부대의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 실미도가 개봉 한 달만에 관객 700만 명 돌파라는 전대 미문의 흥행기록을 세우는 등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자 그동안 역사속에 묻혀있던 실미도의 진상이 베일을 벗고 있다.

본지가 지난 1995년 실미도 사건의 진상을 심층 보도할 당시만 해도 실미도 사건은 어딘가에 묻혀있을 서른 한 명의 유해와 함께 영영 묻혀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실미도 사건이 영화를 통해 재조명되면서 실미도 진상 규명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가고 있다. 1968년 실미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실미도 ‘김신조 사건’ 산물
정전협정 체결 후 극한 대치상태에 있던 19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작부대인 124부대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신조 사건’으로 명명된 이 사건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는 같은 방법으로 북한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공군 제7069부대 소속의 235전대 209파견대를 창설한다. 부대는 실질적으로 중앙정보부 소속이었으며, 공군에서는 훈련만을 맡았을 뿐 일체의 부대관리는 중정에서 맡았다.

68년4월에 결성돼 ‘684부대’로 불렸던 실미도 부대는 1.21 사태 때 남파된 124군부대와 같은 31명으로 구성됐으며, 이들 공작원들은 중정 요원들에 의해 포섭돼 무기수, 매혈자, 노동자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 대부분은 “먹고사는 데 문제없이 해주겠다거나, 죄수자의 경우형을 사면해 주겠다는 꼬임에 넘어갔다.

실미도 부대 소대장 김성진 씨는 “그동안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그들이 모두 사형수나 무기수 같은 중죄인은 아니었다. 날치기나, 소매치기, 담치기 등과 같은 가벼운 범법을 저지르긴 했지만, 범죄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민간인이라고 하는 게 맞다”며 “이들이 이곳에 온 배경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작전 성공 이후에 충분한 보상과 신분 보장 약속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전했다.

이렇게 구성된 684부대는 인간병기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당시 684부대 소대장이었던 김양구씨는 (보통)인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당시 훈련의 잔혹함을 전했다.

7·4공동 성명 발표 등 남북간의 화해무드가 무르익어가자 실미도부대는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어졌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수장이 최형욱에서 이후락으로 바뀌면서 실미도 부대는 골치덩이가 됐다. 정부가 해결책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동안 섬안에 고립된 부대원들의 정부의 무관심에 대한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71년 8월23일 새벽6시 정부가 차일피일 그들에 대한 해결을 미루자 배신감과 분노에 휩싸인 24명의 훈련병들은 마침내 폭발한다.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 청와대를 향한다. 이 과정에서 기간명 12명이 사살되고, 6명은 바다로 뛰어들어 익사했다.

화장실 밑에 숨어있던 기관병과 애인 면회차 외박을 나갔던 김방일 소대장 등 6명만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김 소대장은 “사건이 발생한 직후 실미도에 들어갔는데 내 방 책상위에 ‘소대장님 미안합니다. 어쩔수 없었습니다’라는 내용의 쪽지가 놓여져 있었다”고 술회했다.


‘청와대가서 대통령에게 따지자’
인천 독부리 해안에 상륙한 그들은 해안 초병의 보고로 출동안 군경과 교전을 벌였고,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한다. 당시 사고차량에 있었던 여성은 “그들이 차에 올라타 승객들을 보고 죽이지 않을 것이니까 엎드려 있으라고 말했다”며 당시 그들이 민간인을 살해할 의도가 없었음을 증언했다. 실미도부대 창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장지령 전 총장은 “대통령을 만나 자신들을 죽이던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684부대의 해결을 요구하기 위해서 서울로 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입성에 성공한 실미도 부대원들은 그러나 무장한 군·경 병력에 막힌 더 이상 청와대를 향해 진격할 수 없었고 결국 수류탄 자폭을 결심한다. 그결과 19명이 사망하고 4명만이 생존했으나 이들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정부 의도적 은폐와 방치
정부는 서울 대방동 총격전에 대해 버스를 탈취한 이들이 북한에서 내려온 공비라고 발표했다가 3 시간만에 군특수범의 난동으로 정정 발표하는 등 사건의 진상을 감췄고, 실미도는 그렇게 잊혀질 뻔했다. 그러나 다음달인 9월 국회 대정부 질문과정에서 야당의 초선의원이었던 강근호 현 전북 군산 시장에 의해 최초로 세상에 알려졌다.

강 시장은 대정부 질의에서 684부대의 창설과 훈련, 지휘체계, 부대의 목적 등을 추궁했다. 강 시장의 대정부 질문이 있은 다음날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8·23 난동의 주범은 무장 공비가 아니며 군특수범들도 아니 북파 특수부대 요원들의 난동이었다고 공식 확인했다.

정부는 사건 발생 이틀후인 8월25일 야당이 즉각 조사에 나서자 김이태 전 소대장이 상부의 지시로 군교도소를 방문한다. 사건 발생 4개월 전에 정보전대로 복귀한 김 전소대장은 생존자 4명에게 “야당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입을 다물면 월남에 데려가겠다”며 절대 발설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소대장과의 약속을 지킨 그들은 1972년 3월 끝내 사형 당했다.

사건 발생 가능성을 정보 당국이 몰랐던 건 아니다. 이를 감지한 공군본부는 중앙정보부와 국방부에 공작원에 대한 대책 마련과 함께 684부대 해체를 건의했었다. 김두만(76)전 공군 참모총장은 “70년 8월 취임 직후 실미도 부대원들이 거지처럼 비참하게 생활한다는 보고를 받고 중앙정보부에 정리를 건의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결국 국방부 장관에게 수차례 요청해 ‘71년 11월까지는 부대를 정리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면서 “부대 정리 시기가 3개월만 앞당겨졌어도 40여명이 참혹히 죽는 불행한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치유 시급한 분단시대 민족 상처
국회는 지난 1월8일 본회의에서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안’과 ‘특수임무수행자 지원에 관한 법률안’ 등 북파공작원 관련 법률안을 통과 시켰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이들의 숙원이던 명예회복과 정부 보상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실미도의 진실이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다. 당시 훈련과정에서 숨진 훈련병들의 유해를 비롯해 823 사건의 희생자들 유해 역시 행방이 묘연하다. 정부는 아직도 군기밀이라는 이유로 진상을 밝히지 않고 있다.
실미도는 분단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의 상처다. 더 나아가 정권을 무기 삼아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일삼고, 끝내 죽음으로까지 내 몬 광기의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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