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레즈비언 등 성적 소수자가 한국사회에서 살기란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것과 다름없다. 씨를 내린 부모도, 과학도 증명할 수 없는 이 오묘한 세계에서, 그들은 동성애가 ‘비정상’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혐오적인 분위기 속에서 고통 받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부정하며 평생을 혼란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세상 밖으로 나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외친다. 더 이상 음지에 숨지만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5월3일은 그들에게 뜻깊은 날이다. 이 날,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연대체인 한국레즈비언권리운동연대(이하 ‘레즈비언권리연대’ http://lright.org)가 발족됐다.
국내 레즈비언 인권단체는 총 4개인데, 레즈비언권리연대는 ‘레즈비언인권연구소’, ‘부산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센터’, ‘이화레즈비언인권운동모임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가 결성한 모임이다.
‘게이’와 별개의 독자적 권리운동 시작
한국사회에서 레즈비언 인권운동이 움트기 시작한 건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4년 11월 ‘한국여성동성애자인권모임 끼리끼리’가 발족하면서 레즈비언 인권운동은 시작됐고, 이후 1995년 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와 1998년 한국동성애자협의회를 거쳐 2002년 한국동성애자연합까지 남성 동성애자들과 함께 연대체를 결성해 동성애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끼리끼리 간사였던 박김수진씨는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양적, 질적 성장으로 레즈비언 고유의 연대체가 필요함을 깨닫고 레즈비언 연대체를 결성하게 됐다”고 말한다.
레즈비언권리연대는 “한국사회의 레즈비언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으며, 레즈비언 인권운동 또한 어떠한 사회적 자원도 없는 상태에서 힘겹게 시작됐다”며 “4개 단체가 함께 결성한 연대체는 기존 여성운동이나 인권운동이 포괄하지 못했던 레즈비언의 권리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주장하여 사회적 동의의 기반을 넓혀가려 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이전에도 레즈비언 권리운동가들의 연대 노력은 있었다. 1998년 12월 끼리끼리, 인천레즈비언인권모임 한우리, 부산경남 여성이반인권모임 안전지대, 니아까 등의 공동주최로 열린 ‘끼리끼리 송년의 밤’을 시작으로, 2001년부터는 이들 단체들이 ‘반성폭력네트워크’를 결성해 비정기적 모임을 가졌다. 2002년 이후에는 끼리끼리(현 한국레즈비언상담소)를 중심으로 서울 부산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는 레즈비언들이 정기 모임을 가졌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레즈비언 인권단체가 연대하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다. 작년 11월 4개 단체가 모여 연대 조직을 위한 구상에 착수했고, 올 1월 레즈비언권리운동연대를 공식화 했다. 이와 동시에 ‘성 소수자 범죄사건 지원을 위한 여성연대’를 결성해 연대활동에 돌입했다. 레즈비언권리연대는 발족 선언문을 통해 “한국사회의 이성애주의와 가부장제에 반대하며, 레즈비언의 현실에 바탕을 둔 권리운동과 독자적 권리운동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10대 레즈비언 인권 침해 심각
레즈비언권리연대는 올해 레즈비언 인권 실태조사와 찾아가는 청소년 동성애 바로 알기 강의, 10대 레즈비언 인권 캠프 등의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연대체는 특히 10대 레즈비언 문제에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는 레즈비언들이 사춘기를 겪으면서 겪는 성 정체성의 혼란에 따른 문제들이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레즈비언 인권 실태조사에서도 성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한 시기가 10대 이하(69.3%)의 시기에 가장 많았고, 최초의 동성 교제 시기 또한 10대(56.9%)라고 응답한 레즈비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레즈비언은 동성애자이자, 여성으로서의 이중의 억압에 시달리고 있으며, 특히 10대 레즈비언의 경우 ‘미성년’이라는 신분으로 더 많은 억압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레즈비언 권리연대 측은 “이 사회는 10대의 레즈비언 경험을 ‘이성애자가 되는 과정에서 겪는 한 때의 일’로 치부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이성애자로 성장하기를 강요받고 있다”면서 “이성애중심적인 학교와 가정으로부터 내몰리며, 또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이나 폭력을 당하고 있는 10대 레즈비언이 겪고 있는 인권침해는 매우 심각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