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실업이 40만 명에 육박한다는 통계가 나왔을 때만 해도 엄청난 사회적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어느덧 청년실업은 50만 명을 훌쩍 넘어섰고 이젠 그 ‘숫자’에 무뎌진 분위기다. 계속되는 경기침체로 하반기 고용시장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암담한 현실에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은 옛말이 됐다.
늘어만 가는 청년실업자 증가에 이젠 ‘청백전’(청년백수의 전성시대)이라는 신조어가 현 세태를 말해준다. 오랜 경기침체로 실업난을 겪은 일본에서 성행하고 있는 ‘프리터족’(필요한 돈이 모일 때까지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사람들)이 생계를 목적으로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늘고 있다.
알바 경쟁도 치열
free와 arbit의 줄임말인 ‘프리터’족은 원래 90년대 초반 경제 불황을 맞은 일본 젊은이들이 더 높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수단으로 삼았던 데서 따왔다. 그러나 한국의 프리터족은 높은 취업문을 넘지 못하고 직업 대신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쪽에 가깝다.
서울소재 미대를 졸업한 김지혜 씨(31세)는 전공을 살려 공예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대학에 들어갈 땐 미술과외에 학원비에 기타 재료비 등 한 달 100만원이 넘는 돈이 들었고 입학해서도 수 천 만원의 학비가 들었으나, 막상 졸업할 때가 되니 취직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선배가 주선한 애니메이션 수정 일을 시작했다. 원하던 일은 아니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한 달 80만원 정도의 수입이 되긴 했지만 그마저도 비수기엔 일이 없어 노는 날이 많았다. 얼마 전부터는 어린이집 보육교사로 임시 알바를 하고 있고 간간이 친척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광고기획(간판제작) 일을 하고 있다. 김지혜 씨는 “당장 먹고 살 걱정에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하곤 있지만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이젠 내 꿈도 희망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김 씨처럼 취업이 안돼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생계형 프리터족이 아르바이트생 5명 중 3명에 달한다. 취업 포털 사이트 ‘인크루트’(www.incruit. com)가 최근 미취업자를 대상으로 실태 조사를 한 결과, 61.8%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이들 중 68.7%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구직활동을 병행하는 ‘한국형 프리터족’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경쟁에 치열해 아르바이트 자리도 좀체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근무여건이 좋거나 경력을 인정받아 정규직 취업이 가능한 서비스직 등의 ‘알바’는 경쟁률이 일반 취업 못지않다.
인크루트 이광석 대표는 “청년실업률이 전체 실업률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심각하다보니 정규직 대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국형 프리터족이 늘고 있다”며 “이같은 현상이 장기화될 경우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꿈도 희망도 없다… 구직포기 ‘만년백수’
누가 알까 말까 기죽어 살던 이들도 인터넷 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통해 ‘동병상련’의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 백수들을 위한 사이트 ‘백수닷컴’(www.baeksoo.com)이 바로 그 곳이다. 백수들의 생활 모든 것이 있다. 서로의 고민과 걱정을 나누고 세상을 향해 욕을 해대기도 하며, 정보교류는 물론 취업준비도 한다. 오죽 못났으면 그 나이에 놀고 먹을까 한심한 시선을 보내겠지만 이들도 나름대로의 말 못하는 사정이 있다. 일을 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곳이 없이 놀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렇다.
대부분이 참담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과 푸념들이다. 백수생활 4개월에 접어들었다는 작성자 ‘지친백수’는 “내 자신이 정말 답답하다. 예전엔 하고 싶은 것도 희망도 있었는데, 지금은 하고 싶은 것도 희망도 멀어져 간다”며 자신을 한탄했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작성자 ‘길손’은 “인생의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직장의 의미도 찾을 수가 없다. 초라한 자신뿐”이라는 말로 나이에 중독 돼 가는 현실을 비관했다.
아무리 취업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아 불가피하게 백수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눈높이를 높여 취업하지 못하는 ‘배부른 백수’들이 더 문제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 속에서 자기 일을 찾기 때문이다. 취업을 못하는 이유를 이들은 불경기에 극심한 취업난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실은 능력은 50도 안되는데 힘든 일은 하기 싫고 보수와 대우는 남들처럼 받길 바라는 욕심에서 비롯된다. 폼나고 세련된 일만 좇다 보니 진정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헤매고 방황한다.
취업난에 휴학을 거듭하다 올해 지방대 디자인학과 졸업예정인 K씨. 무작정 이력서를 넣고 있지만 연락 오는 곳이 없어 불안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 안정된 직장이냐, 새로운 일이냐를 놓고 계속 갈등한다. 전공인 제품디자인을 하고 싶다가도 디스플레이 일도 하고 싶고 영화공부에 도전하고 싶기도 하다.
만년백수 L모씨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유통업 쪽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루 15시간씩 쉬는 날 거의 없이 일하고 한달에 200~250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하지만 일이 힘들고 쉬는 날이 적다는 이유로 사표를 던지고 나와 백수 재수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너무 힘들어 잠시 쉬려고 그만 둔 것 뿐, 이미 경험해본 백수생활 잠시 하는 건데 이해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주변의 핀잔을 서운하게 생각한다.
한창 일하며 미래를 꿈꿔야 할 젊은이가 무기력하게 놀고 있다는 것은 국가·사회적으로도 엄청난 손해이다. 이는 해당 개인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물질적, 심리적 피해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청년실업이 50만 명일 때 우리나라 10집 중 4집 정도가 집안에 한 명씩은 ‘백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대단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