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한국역사 대변해온 ‘고바우’
김성환 화백, ‘고바우 半世紀展’통해 지난시간 반추
지난 9월 29일로 ‘매일 마감’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고바우영감’ 김성환 화백(68세)은 세종갤러리 제3전시실에서 시종 여유로운 표정으로
팬들을 만나고 있었다. ‘고바우반세기전(半世紀展)’ 기념책자에 서명을 하고 펜의 잉크가 앞장에 눌리고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명후 화장지로
꼬옥 눌러 마무리까지 하는 모습은 그의 지난 50년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네컷에 꼼꼼한 역사실어
유난히 다사다난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시사만화가로 50년을 보낸 김성환 화백은 18세때인 1950년 부터 매우 바빴다. 만화 ‘멍텅구리’를
연합신문에 연재하면서부터 그의 만화인생이 반세기를 있다. 신문연재회수 1만 1.439회의 세계최장기록을 세우며 우리나라 근대사의 굴곡은 김성환
화백의 네컷에 반영된다.
돌덩이를 가슴에 얹은 듯한 ‘매일마감’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그가 이제는 국화빵 같은 생활을 접었다. 그동안 김화백은 뉴스에 신경쓰다보니
딴 그림도 못 그리고 해외여행도 마음편히 한적 없다. 김화백의 이런 처지를 딱하게 여겨 그는 이따금씩 그림을 그려놓고 여행을 다녀오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었다.
딱 한번, 머리나 식힐겸 동남아 여행을 떠난적이 있기는 하다. 1979년 5월 부마사태를 전후해서다. “내가 어딜 가면 국내에 꼭 일이
터지는 거야”, 오랜만에 어렵사리 시간을 내서 그리 개운치 못한 마음으로 떠난 여행이 그만 독자들에게 ‘정부로부터 야합했느냐’는 오점을 남긴다.
“여행전 신문 1면에 여행간다고 기사가 나가진 했지. 하지만 누가 그 몇줄짜리 기사를 보나?”
머리카락 한올에 담은 표정
김성환화백이 한국전쟁중 다락방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창조해낸 고바우영감은 표정이 없다. “표정을 담으면 얼굴이 윤택해져서 서민을 대변할
수 없지”, 그래서 김화백은 머리카락한올에 심리를 대변한다.
평상시엔 구불어진 상태로, 놀라면 머리가 똑바로 서고, 어처구니가 없거나 터무니없는 일을 대하면 한올의 머리는 꼬불꼬불한 상태로 바뀐다.
지난 1955년 2월 동아일보를 통해 처음 네컷만화에 얼굴을 보인 고바우영감은 50년대엔 두루마기에 모자를 쓴 모습으로 시작해서 70년도엔
월급을 받지못해 살이 빠진 홀쭉한 모습을 담았다.
더욱 단순화되면서 친근해진 현대의 고바우영감은 50년동안의 한국서민의 거울이었기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일할때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을때도
있었지만 신문사의 편집부와 논조가 맞지 않을때도 있었거든. 그럼 본의 아니게 ‘고바우영감’이 주눅이 들지. 그럼 독자들로 부터 당장 전화가
왔어”, 실제로 ‘고바우영감’네컷은 늘 독자들로부터 미행(?)을 받은 덕에 만화의 바로 하단에 실린 광고는 신문사에 짭짤한 수입을 올리는 효자노릇을
하기도 했다. 네컷중 한컷 크기보다 조금더 큰 광고란은 부장급간부들 몇명의 월급을 책임질 정도로 ‘고바우영감’의 일거수일투족은 독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고약’같은 시사만화가 기대
현재 김화백은 국방일보에 잡학백과를 연재하고 있다. 매일마감에 이어 격일마감의 일을 하고 있지만 이전 ‘고바우영감’과는 모습을 달리한다.
역사의 인물에 얽힌 비화를 소개하며 삽화를 싣는 형식이다.
이제 시사만화가로서 50년을 보낸 김화백이 지나간 역사를 소개하는 1년을 시작하고 있다. 시사만화가로서 대한민국건국과 함께 시작한 시사만화가로서
현재 활동중이거나 시사만화가를 지망하는 이들에게 김화백은 “글쎄요..잘들그리던데...”라고 잔잔한 미소를 띠운다. 아무말 할 것 같지 않았던
김화백은 이윽고 천천히 말문을 연다. “70년대 동아언론 자유쟁취추진위원회가 있었어요. 주목적이 순수하게 ‘언론을 보호하자’라는 취지였지요.
생존권은 그 다음 문제였지.”
타산적인것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언론을 보호하기 위해 자존심을 더 앞세웠다는 그의 말에서 50년 동안 그가 보인 고바우영감에 들인 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현재 어려운 경제로 생활고의 위협에 시달리는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강남일대 돈많은 집에서 돈쓰는 것은 중요치 않아. 어느
시대나 그런사람은 있기마련이야. 국민의 대다수가 그렇다면 문제지만 소수라면 문제삼을 필요 없어요. 그들 이용해서 생존하는 사람이 있거든. 돈암동
창녀촌은 10대의 윤락소녀가 문제이지 성인 윤락녀까지 문제를 삼는다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고바우 영감이 고개를 넘다가 고개를 다쳐서 고약을 발랐더니 고만 낳더래…’, 1950년대 부터 60년대까지 불리워진 작자미상의 동요를
불러보며 김화백의 뒤를 이어 우리사회를 끊임없이 흔들어 깨워줄 ‘고약’같은 시사만화가의 탄생을 다시한번 기대해 본다.
조정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