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쌀쌀해지면서 극장가는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로 물들기 시작했다. 9월에 ‘외출’ ‘종려나무 숲’ ‘너는 내 운명’ ‘사랑니’가 개봉했고, 이달부터 다음달까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새드무비’ ‘소년, 천국에 가다’ ‘사과’ ‘사랑을 놓치다’ ‘애인’ ‘파랑주의보’ 등의 작품들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양적으로만 풍성한 것이 아니다. 통속극에 머물던 멜로가 진일보하면서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는 추세. 다채로운 감성과 스타일의 멜로물들을 놓고 관객들은 행복한 고민에 사로잡힐 듯하다.
울어도 좋아
올 가을 멜로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로맨스를 보여주는 영화는 전도연 황정민 주연의 ‘너는 내 운명’이다. 노인들의 사랑을 담은 ‘죽어도 좋아’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박진표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너는 내 운명’은 다방 종업원과 농촌 총각의 순애보, 전남편의 폭력, 매춘부로 전략, 치명적 질병 등 1970년대 호스티스 멜로를 떠올릴 만큼 전형적인 신파 요소들을 모두 모아놓았다. 예고편만 봐도 뻔해 보이는 이 영화는 하지만 ‘진심’의 힘이 담긴 비범한 신파로 관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객석이 온통 울음바다가 됐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감성적인 여성 관객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주연 배우의 열연과 감독의 내공으로 진중한 깊이를 지녔다는 평가까지 더해지면서 빠른 속도로 관객층을 넓혔다.
정통 멜로를 정공법으로 다루는 ‘너는 내 운명’은 사실 1990년대 중반 이후 애정물에게 찾기 어려운 스타일이 됐다. 멜로드라마가 사랑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으면서 사랑이 그렇듯, 멜로물 역시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된 것은 이미 오래. 하지만 이 같은 신파의 힘은 적어도 가을에는 여전한 위력을 갖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작년 가을 극장가를 점령한 영화 ‘가족’은 영화 관계자들이 전혀 흥행을 예측하지 못했던 히든카드였다. 스타가 등장하지 않는데다 이미 한물 간 줄만 알았던 전형적 최루물의 형식을 지닌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감수성 자극받는 가을에 울고 싶은 관객들의 마음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관객의 모습을 다큐처럼 담아냈던 ‘가족’의 TV 광고는 작정하고 관객을 울리는 흥행전략의 노골성을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요즘 멜로 풍경, 떼거지 연애
남녀가 만나서 티격태격 유쾌하게, 또는 애절하게, 또는 쓸쓸히 계속 사랑하든가 헤어지든가 하는 결말로 흘러가는 멜로의 정석은 이처럼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견고한 ‘틀’이 깨어지기 시작한지 오래다. 김정은 주연의 ‘사랑니’나 ‘소년, 천국에 가다’ 같이 멜로는 판타지와 결합하기도 하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새드무비’ 등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일상의 삶에 밀착해 들어가기도 한다.
특히 올해 로맨스물들은 한층 삶 속의 사랑, 자아 속의 사랑의 존재에 대한 깊이를 지닌 작품이 풍부해졌다. 단순한 짝짓기에서 벗어나 한 인물의 사랑의 연대기를 풀어나가면서 내면을 읽거나, 여러 인물들의 사랑을 나열하면서 사랑에 대한 본질적 탐구에 이르는 식이다. 트렌드가 이렇다 보니 주인공 두 명으로 딱 떨어지던 과거와는 달리 등장인물들이 많아지는 현상은 드라마에서조차 뚜렷한 경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문소리 주연의 ‘사과’는 주인공 여자가 두 남자에 걸쳐 경험하는 사랑과 결별의 과정을 통해 20대 후반 여성의 심리를 심층적으로 보여준다. 30세 학원 강사와 17세 소년의 사랑을 그린 ‘사랑니’는 역 원조교제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옛 연인과 현재의 사랑이 교체하는 독특한 설정을 통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사랑의 원형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종려나무 숲’ 또한 할머니, 어머니, 딸 등 3대에 걸친 슬픈 사랑이야기 속에 사랑의 속성과 운명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지방대 여교수와 다섯 남자의 애정을 코미디의 양식으로 보여주는 색다른 연애담이 될 전망이다.
로맨스도 인생이다
2003년 개봉해 인기를 모았던 ‘러브 액츄얼리’는 충무로 멜로에 영감을 주었다. 여러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과 ‘새드무비’는 ‘러브 액츄얼리’를 떠올리게 한다.
일단 두 영화 모두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스타가 대거 출연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엄정화 황정민 임창정 김수로 주현 등이 출연하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각기 다른 여섯 커플의 사랑을, 정우성 임수정 차태현 염정아 신민아 손태영 등이 출연하는 ‘새드무비’는 네 커플의 찬란한 이별을 다중스토리 구조를 통해 보여준다.
이들 영화가 ‘러브 액츄얼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단지 옴니버스 형식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군상들의 삶, 그 중심부에 놓인 사랑에 밀착해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면서 어렵게 생활하는 청년(임창정)이나 20년째 단관 극장을 운영하며 지내는 고집불통 구두쇠(주현), 데이트 비용을 벌기 위해 스파링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난한 고시생(차태현)의 이야기 등 ‘다중 멜로’들은 로맨스를 다양한 세대와 계층의 인생 드라마 속에 녹였다. ‘너는 내 운명’ 또한 계층적 선입견에 대한 진중한 시선이 평론가들에게 인정받기도 했다.
멜로의 변종, 혹은 다양성은 이 시대의 삶과 사랑을 담기에 멜로의 도식은 불편하고 억지스럽다는 자연스러운 인식에서 형성된 것이다. 헐리우드 차용이 많기는 하지만 멜로에 대한 새로운 실험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만큼 사랑에 대한 담론이 깊고 풍부해졌다는 반증이라는 점에서 반길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