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만희 감독이 영화를 통해 되살아난다. 10월6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된 이만희 감독 회고전을 갖는다. 이번 회고전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 ‘귀로’ 등 모두 10편이 상영된다. 특히 미발표작 ‘휴일’은 일반에 최초 공개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이만희’를 만날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번 회고전에 대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 조영정 프로그램 코디네이터의 도움으로 알아보았다.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 재조명
조영정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는 “이만희 감독의 회고전은 언제 어디서든 충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만희 감독을 적극적으로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성 자체의 영역 밖에서 찾을 수 있다”며, “1990년대 중반 이후, 장르영화가 주류를 형성하고, 작가적 상상력 역시 장르영화의 틀 속에서 다듬어지는 현재 한국영화계의 현상은 이만희 감독을 과거로부터 현재로 불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한 해 영화제작편수가 100편을 초과하면서 영화 산업의 기반이 다지기가 절실하게 요구되던 1960년대 초반 이만희 감독이 등장했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세계는 독특한 자신만의 영역을 표기하는 작가영화와 대중적인 욕망의 지표를 표현하는 장르영화의 접점에 서 있었다. 현재 충무로의 영화적 경향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이만희 감독은 유행장르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모든 장르를 섭렵해 나갔다. 당시 유행했던 스릴러 영화의 대가로 떠올랐고, 대규모 예산을 투입한 대작이 등장하던 시점에 전쟁영화의 진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상업적으로 늘 안정성을 보장했던 멜로드라마를 시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 프로그래머는 “장르영화를 통해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자화상을 자신의 눈을 필터 삼아 재현해냈다”고 이 감독을 평가했다.
작품 중 몇 편은 ‘짙은 사회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아 평단의 지지를 받았고 상도 받았지만, 이 감독의 많은 다른 작품들은 ‘상업영화’라는 폄하 속에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로 불리기도 했다.
조 프로그래머는 “이제 우리는 장르영화에 열광하는 관객과 장르영화의 영화적 가치와 필요성을 인식하는 평론가가 존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며, “이만희 감독의 대중성을 통해 가장 이만희적인 영화적 언어를 발견할 수 있음을, 그리고 그의 정교한 장인적인 테크닉이야말로 그의 작가정신을 그려낼 수 있었던 도구였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며 선정사유를 밝혔다.
한국영화의 새 지형을 그린 걸작들
회고전의 상영작은 이만희 감독의 대표 장르인 전쟁영화와 스릴러가 다수를 차지한다. 전쟁 영화로는 당대 최대 제작 규모를 과시하면서도 전쟁의 참상과 인간적 감수성을 깊이 있게 그려낸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북한군 장교와 남한의 유격대 대장으로 만난 형제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무의미함을 포착한 ‘군번없는 용사’,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날 38선에 위치한 초소에 있었던 5명 병사들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04:00-1950’이 소개된다.
조 프로그래머는 “이만희 감독에게 있어 영화 만들기는 종교적인 소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이러한 소명의식을 부여한다. 그의 영화들은 극단적인 한계 속에 버려진 인물들의 이야기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갈 준비가 된 인물들이었다”며, “그렇기 때문에 이만희 감독의 영화들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지 모른다. 그는 전쟁이 가져오는 불분명한 도덕적 잣대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매혹을 스크린 속에 투사시켰다. 그리고 그의 창조물들은 한국영화의 미학을 진일보시켰다”고 평가했다.
이만희의 작품 목록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장르는 스릴러다. 자기만의 법칙으로 살아가는 범죄 조직의 보스와 그의 아내의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고리를 엮어나간 ‘검은 머리’,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소용돌이를 그린 ‘마의 계단’, 죽음의 덫에 걸린 뒷골목 건달과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거리 여자 사이의 심리를 담아낸 ‘원점’이 관객들을 만난다.
1960년대 초반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만주액션을 재정의하고, 장르적인 유희를 펼치는 후기 대표작 ‘쇠사슬을 끊어라’, ‘만추’와 더불어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만희 감독의 대표작 ‘귀로’ 역시 프로그램에 포함됐다. 1960년대 말, 강요된 과거의 역사와 국가 주도의 산업화, 도시화 물결에 질식됐던 한국 사회의 단면을 그려낸 이 영화는 이만희 감독 영화 세계의 풍부함을 재확인시켜준다.
세미나, 회고의 밤 등 행사 다양
이번 회고전은 이 감독의 미공개 영상들이 공개되는데 남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만추’의 부재를 달래 줄 또 하나의 작품인 ‘물레방아’는 이만희 감독의 전성기를 함께 한 서정민 촬영감독의 아름다운 촬영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한국 문예영화에 새로운 지형도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운드 일부가 소실돼 일반에 공개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이 작품은 이번 회고전에서 소실 부분이 자막으로 복원되어 상영될 예정이다.
미발표작 ‘휴일’ 또한 최초로 일반에 공개된다. ‘휴일’은 이만희 감독의 실험정신과 완숙함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60년대 말 도시를 살아가는 젊은 남녀의 절망과 좌절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퇴폐적인 정서와 암울함을 그렸다는 이유로 상영 허가를 받지 못했다.
이번 회고전은 대표작 상영 외에도 13일 ‘한국영화 회고전 세미나-이만희 감독의 삶과 영화’를 통해 이 감독을 재조명한다. 한국영화학회와 부산국제영화제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 세미나에서는 그의 영화 세계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며, 그의 영화들이 한국영화사에 차지하는 의미를 재확인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에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영화인과 후배 영화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만희 감독의 삶과 영화를 기억한다. 올해로 5년째 한국영화 회고전을 후원해 온 에르메스 코리아가 주최하는 ‘한국영화 회고전의 밤’이 그것. 이 자리에서는 영화학자들이 지난 3년 동안 이만희 감독의 영화 세계를 기념하기 위해 준비해온 책자를 소개하고 이 감독을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