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문화계는 전형화 된 틀을 부수려는 전복적 움직임이 유난히 많았다. ‘안녕 프란체스카’ ‘올드미스 다이어리’ 등 시트콤에서도 드라마 공식을 조소하거나 기존의 인물관을 뒤엎는 시도를 했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내 이름은 김삼순’은 신데렐라 판타지의 양식에 기대어 신데렐라 판타지를 비판하는 영리한 방식으로 시청자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스타 배우가 티켓파워를 지닌다는 흥행 공식도 깨졌다. 스타가 출연하지 않은 ‘말아톤’ ‘웰컴 투 동막골’ 등이 관객을 모았고, 중견배우 김수미가 티켓파워를 과시하며 스타덤에 오르는 이례적인 사례도 나타났다. 더 이상 30대 여배우들이 유부녀나 이혼녀의 딱지를 힘겨워하지 않아도 됐다. 고현정 최진실 등의 배우들이 이혼의 이력에 상관없이 사랑받았고, 엄정화 전도연 김선아 등 올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스타들은 모두 30대였다.
대중의 감수성은 과거 회귀적인 성향이 강했다. 공동체적 가치관이 살아 숨쉬는 순박한 시골 마을, 순정과 신파가 효력을 발휘하는 멜로의 세계에 대중들은 푹 빠졌다. ‘웰컴 투 동막골’과 ‘너는 내 운명’은 이 같은 대중 심리를 잘 보여준 예라 하겠다.
김삼순
올해는 대중문화에서 가장 진보한 여자 캐릭터가 등장했다. MBC ‘내 이름은 김삼순’은 전통적인 모티브인 신데렐라 판타지에 비범한 파격들을 숨긴 기념비적인 드라마였다. 삼순이는 대중문화에서 만들어온 여성관의 전복을 응축한 캐릭터. 그 이름의 상징처럼 조금도 세련되지 않았고, 착하지도 않으며, 고상하거나 성적으로 침묵하지도 않는 삼순이에 시청자는 열광했고, ‘캔디형’ 인물을 내세운 아류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김삼순은 오늘의 여성상을 드러내는 나침판이자, 대중문화의 변혁이었다.
웰컴 투 동막골
올해도 남과 북을 소재로 한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800만명 이상의 관객동원에 성공한 ‘웰컴 투 동막골’이 그것. 이 영화는 역대 한국영화 순위 4위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어 모아 영화에 등장한 사투리가 유행했고, 제목이 패러디로 애용되기도 했다. 특히 남북의 공조와 사투리, 코미디, 개성강한 조연급 배우들의 어울림 등 흥행 트렌드의 집약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촌티
‘웰컴 투 동막골’은 과거지향적 향수라는 트렌드의 적중이기도 했다. 올해 문화계를 지배한 코드는 단연 촌스러운 과거 감수성의 회귀였다. ‘웰컴 투 동막골’의 순박함이 그랬고, ‘너는 내 운명’의 농촌총각의 순애보가 그랬다. 도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아이템들이 현실화되면서 공허해진 마음을 달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전통적인 감수성에서 위안을 찾는 경향이 뚜렷했다.
김수미
중견의 재발견, 그 대표주자가 김수미다.
‘마파도’ ‘가문의 위기’ ‘귀엽거나 미치거나’ ‘안녕, 프란체스카3’ 등 김수미는 영화와 TV를 오가며 최고의 코믹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연말 청룡영화상에는 네티즌들의 인기투표로 선정된 인기상에 이례적으로 포함되기도 했다. 중견배우들은 공로상이나 수상하는 관행을 생각하면 획기적 사례였다. 김수미의 인기는 여운계 나문희 김지영 등 중견 배우들의 부상 트렌드와도 관련이 깊지만, 톡톡 튀는 개성과 일상성을 벗어난 유머감각을 주목하는 젊은 세대들의 새로운 감수성을 보여준 결과기도 했다.
노홍철
튀는 스타일과 엽기적 행동으로 빚어내는 비일상적 캐릭터에 대한 선호는 노홍철이나 현영의 인기에서도 확인된다. 올해 방송가에서 가장 각광받은 스타가 바로 노홍철. 요상한 헤어스타일과 의상, 매우 빠르고 큰 목소리와 좌충우돌 멘트 등으로 스타덤에 오른 노홍철은 ‘가는 거야’ 등의 말을 유행시키며 2005년을 자신의 해로 장식했다. 현영 또한 비음 섞인 독특한 말투와 금기를 깨는 솔직함 등으로 인기를 누렸다.
고현정
30대 여배우는 더 이상 시들어가는 꽃이 아니었다. 엄정화 최진실 전도연 김선아 등 원숙한 여배우들이 전성기를 누렸다. 더불어 이혼녀들에 대한 편견도 예전과 같지 않음을 확인시켜준 해이기도 했다. 고현정 최진실 등의 이혼한 여배우들은 대중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 같은 분위기와는 다르게 심은하는 복귀에 대한 대중들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결혼으로 은퇴를 선언해 ‘유부녀 스타들의 시대’를 무색케 하기도 했다.
위버섹슈얼
섬세한 매너와 여성적 외모의 메트로섹슈얼 이미지의 스타가 지고 터프한 남성성에 속내는 자상하고 부드러운 감성을 갖춘 위버섹슈얼한 스타가 떴다. ‘프라하의 연인’ 김주혁은 대표적인 위버섹슈얼 코드로 남성적 매력에 목말랐던 여성들을 휘어잡았다. ‘태풍’의 장동건, ‘야수’의 권상우, ‘로망스’의 조재현, ‘이 죽일 놈의 사랑’의 정지훈 등이 위버섹슈얼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그림2>아이다
올해도 공연계의 지배 코드는 뮤지컬이었다. 올해 뮤지컬은 더 많은 편수와 더 많은 관객과 더 발전적 모습으로 공연계를 휩쓸었다. ‘아이다’는 올해 대형뮤지컬의 선전을 보여준 결정적 사례 중 하나. 가수 옥주현이 캐스팅돼 화제를 몰기도 했다. 이외에도 올해 뮤지컬은 ‘헤드윅’ ‘아이 러브 유’ 등 중 소극장 뮤지컬의 약진이 두드러졌고, ‘겨울공주 평강이야기’ ‘인당수 사랑가’ 등의 창작뮤지컬의 가능성도 보여줬다. 하지만 공연계의 형태는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X파일
대중문화 시장의 시스템 문제로 불거진 사건 사고와 ‘스타 이미지’가 허상에 불과함을 대중에게 새삼 각인시켜주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X파일을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연초 연예계에 터진 거짓말 같은 핵폭탄이었다. 무려 125명에 이르는 연예인 한 명 한 명에 대해 매력에서 소문까지 말 그대로 ‘파일’로 정리된 이 자료는 사실 논할 가치가 없는 수준의 풍문에 불과했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언론과 연예인은 물론, 대중의 수준까지 드러낸 어이없는 해프닝이었다. 개그맨 폭행과 노예계약 파문, 강우석 감독의 발언으로 불거진 영화계 시스템 논란, 상주 콘서트 대형 참사 역시 자리 잡지 못한 대중문화 시장과 시스템의 문제를 상처투성이로 확인시킨 사례다. 미술계의 경우 위작 논란이 미술계의 시스템 전반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성기노출
올해도 노출은 역시 이슈였다. 지난 7월 MBC ‘생방송 음악캠프’ 남성 5인조 펑크 그룹 럭스(RUX)의 안무팀 카우치의 멤버 2명이 옷을 벗고 전라로 카메라 앞에 나타난 사건은 올해 방송가에 가장 쇼킹한 사건 중 하나였다. 사건 자체는 해프닝일수도 있었지만 시청자들의 분노는 해프닝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프로그램과 관계자의 중징계와 더불어 해당 멤버들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며 종결됐지만, 인디밴드 자체가 타격을 받는 상처를 남겼다. 이외에도 MBC ‘달콤한 스파이’가 11월 목욕탕 장면에서 남자 연기자의 음부가 노출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노출은 여전히 단단한 금기였다. 그것이 도발이든 실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