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1000만 시대를 열었던 작년의 열기를 이어 한국영화는 올해 여전히 뜨거운 전성기를 누렸다. 한국영화 흥행 기록 4위를 새로 쓴 ‘웰컴 투 동막골’을 비롯, 올해 한국영화는 많은 흥행작들을 쏟아내며 관객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다양한 장르와 형식으로 질적 성장을 이루어낸 올해의 흥행작들을 중심으로 한국영화계의 특별한 키워드를 살펴보았다.
냉혹한 현실, 영화에서 위안을 얻다
여전히 국민들의 가슴은 시린 것일까. IMF 이후로 강세를 보였던 따뜻한 이야기, 가족 드라마, 휴머니즘이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마라토너 배형진군의 감동 실화를 다룬 조승우 주연의 ‘말아톤’은 1월 개봉, 설 연휴를 맞아 가족이라는 공감대를 무기로 전국 518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상반기 최고의 흥행작이었던 이 작품은 배우 조승우의 티켓 파워를 확인한 영화가 되기도 했다.
800만명 이상의 관객동원에 성공한 ‘웰컴투 동막골’ 또한 휴머니즘이 흥행의 중심 코드였다. 이 영화는 특히 남북한의 화해 무드를 타고 민족적 동질감과 연대의 메시지로 관객에게 어필하는데 성공했다. 가을 멜로 열풍 속에서 최고의 관객몰이에 성공한 ‘너는 내 운명’ 또한 냉혹한 세상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사랑의 힘을 보여줘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다시 만난 감독&배우
전작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감독, 배우가 다시 뭉쳐 호흡을 과시하는 사례가 많았다. ‘친절한 금자’의 박찬욱 감독과 이영애가 그 중 가장 화제였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한번 같이 작업한 바 있던 그들은 특히 스타 감독과 스타 배우로서 크게 주목받았다.
이밖에도 ‘킬러들의 수다’의 인연을 계기로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다시 뭉친 장진 감독과 신하균, ‘비천무’에서 함께 작업했던 김영준 감독과 신현준이 ‘무영검’으로 재결합했다. ‘광식이 동생 광태’의 김현석 감독과 김주혁 또한 ‘YMCA야구단’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연말에 개봉하는 대작 ‘태풍’ ‘왕의 남자’ ‘청연’ 역시 감독과 배우들이 두 번째로 호흡을 같이 한 작품들. ‘친구’의 곽경택 감독과 장동건, ‘황산벌’의 이준익 감독과 정진영, ‘소름’의 윤종찬 감독과 장진영이 다시 의기투합했다. 감독과 배우의 반복 작업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감독과 배우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서로에게 적응하는 탐색기간 대신 작품에 몰입하는 시간을 늘려준다는 점에서 이점이 많다.
스타보다 연기파 배우에 간객 몰려
‘여느 때 보다 연기파 배우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것도 2005년 영화계의 중요 키워드. 스타보다 연기파 배우나, 개성적인 조연급 배우들이 흥행작을 오히려 많이 만들어 냈다. 연극무대와 스크린을 통해 알려졌던 조승우는 상반기 흥행 대작인 ‘말아톤’으로 연기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최고의 남자배우 대열에 올랐다. 또한, 신하균 정재영 강혜정은 ‘웰컴 투 동막골’에서 뭉쳐 개성적인 조연급 배우들이 스타보다 더 파워풀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박해일 황정민 등도 2005년 다양한 작품을 통해 스타가 아닌 연기파 배우의 흥행력을 보여줬다. 이정진 이문식 여운계 김을동 김수미 등 조연급 배우들만 출연한 ‘마파도’의 흥행 성공도 스타의 티켓파워가 허상임을 증명한 사례가 됐다. 특히 김수미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종횡하며 강력한 흥행 파워를 과시했다. 그동안 스타 배우들만이 흥행메이커로 여겨지던 기존의 영화시장에서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의 작품이 흥행성 면에서도 인정받는 것은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라 하겠다.
영화음악의 진보
충무로의 영화음악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 어제 오늘은 아니다. 더 이상 팝 삽입곡에 의존하지 않고, 실력파 뮤지션들의 새 피를 수혈 받거나 유명한 외국인 음악감독을 영입하면서 질적 향상을 추구한지 이미 오래. 올해는 더욱 성장한 모습이 돋보였는데 특히 한국 영화 크레딧 음악감독 부문에서 해외 음악가들의 이름이 심심찮게 오른 것이 올해의 특색이었다.
바람의 검심’ ‘살인의 추억’을 통해 국내에서도 익숙한 세계적인 음악감독 타로 이와시로가 두 번째 한국 영화로 ‘6월의 일기’를 택해 음악 작업을 했다. 또한 ‘야수’의 음악은 ‘공각기동대’ ‘링’ ‘이노센스’로 유명한 가와이 켄지가, ‘청연’은 ‘이중간첩’ ‘인디안 썸머’ 등을 통해 이미 몇 차례 한국 영화음악 작업을 경험한 독일 음악가 미하엘 슈타우다허가 맡았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음악감독들의 ‘한국 영화음악 진출’ 바탕에는 한국 영화의 발전과 위상이 한 몫을 했으며, 역으로 이들은 작업을 통해 한국 영화음악의 발전에 기여했다.
올해는 대중음악계의 실력 있는 뮤지션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대표적으로 이병우, 정재형 음악감독을 꼽을 수 있다. 1990년대 ‘베이시스’의 리더로 음악성을 인정받은 정재형은 파리에서 2년간 영화음악을 전공, 한국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97년 ‘마리아와 여인숙’의 작업을 시작으로 ‘중독’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거쳐 올해는 ‘오로라 공주’를 통해 음악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특히 멀티 기타 플레이어 출신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새 지평을 연 뮤지션 이병우 감독 역시 해외 유학 후 영화음악에 입문, 음악을 담당한 작품마다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며 한국 영화음악의 새 지평을 열고 있는 인물. 그는 ‘마리이야기’ ‘스캔들’ ‘장화, 홍련’ ‘연애의 목적’에서는 물론 최근 개봉작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를 통해 영화음악의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번 과시했다. 연말 개봉할 ‘왕의 남자’로 또 한번 실력을 보여줄 예정이다.
2006년 어떤 코드가 이어갈까
올해 유행 키워드가 내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무엇보다 올 가을부터 불피기 시작한 멜로 열풍은 내년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전통적인 멜로 장르보다 다양한 장르에 멜로적 감수성을 녹이는 형태가 많다. 멜로는 비교적 적은 제작비로 짧은 기간 동안에 만들 수 있는데다 관객층이 어느 정도 확보돼 있다는 것이 장점. 특히 대중의 휴먼드라마의 갈망은 경쟁이 치열하고 테크놀로지가 발달할수록 더 커지기 마련이라 내년에도 여전할 것이라는 전망으로 이 같은 작품들이 많이 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비슷한 이유로 코미디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말아톤’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인간승리 드라마의 인기는 내년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연기파 배우의 티켓파워 또한 관객들의 눈높이가 올라감에 따라 더욱 굳어질듯하다. 스타를 내세운다고 흥행을 보장받는 시대는 저물어가는 셈이다. 올해 주목받은 신예배우들의 활약상도 지켜볼만 하다. ‘달콤한 인생’ ‘6월의 일기’로 스크린 스타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문정혁, 신예답지 않은 카리스마를 지닌 ‘무영검’의 윤소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광식이 동생 광태’ 통해 스크린 기대주로 관심을 모은 정경호 등의 신예들의 성장도 관심을 끈다. 배우뿐만 아니라 유독 눈에 띄는 신인감독들이 많기도 한 해였다. 이들의 후속작과, 중견감독들의 신작들이 2006년 관객들과 어떤 모습으로 만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