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쿼터 축소 논란으로 문화계가 혼란스럽다. 빅 스타들이 1인 시위를 하고, 문화관광부로부터 받은 옥관훈장까지 반납하며 스크린쿼터 축소에 반대하고 있지만, 여론은 예전만큼 그리 호의적이지 않아 보인다. 대다수 관객들이 보기에 점유율 60%대로 성장한 한국영화에게 더 이상 ‘보호막’이 필요한지 의문이다. 다양한 영화를 볼 관객의 권리를 위해 스크린쿼터가 필요하다는 논리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경쟁력 아직 부족하다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논란에는 여러 가지 이슈들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 경쟁력과 다양성만 이야기해보자. 우선, 한국영화가 경쟁력을 갖췄다는 주장은 위험한 논리인 것은 사실이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관객도 많이 보고 돈도 번다니 한국영화가 거대해진 것 같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탄탄한 시스템도 산업적 기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약골이기 때문이다. 점유율이고 곧 경쟁력의 지표는 아니다. 언제고 떨어질 수도, 올라갈 수도 있는 것이 점유율일 뿐이다.
하지만 스크린쿼터가 다양성을 보장한다는 영화인들의 주장에는 반론의 여지가 많다. 한국영화는 많아졌지만 그것이 곧 다양성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몇몇 대자본 영화가 배급망을 점령하고 흥행성을 수학공식처럼 짜 맞춘 저질 영화들이 넘치며, 인권영화 ‘다섯개의 시선’이나 아프가니스탄 여성영화 ‘천상의 소녀’ 같은 작품들은 관객과 만나는 기회가 적은 현실은 스크린쿼터와 관계없이 존재해온 비극이다.
문화주권 지키기와 다양성 보장에 스크린쿼터의 의미가 시들해진 것은 사실상 한국영화가 헐리우드 영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데 있다. 힘의 논리가 아니라 정신세계 자체가 독립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화주권을 지키자면서 한국영화의 절대다수는 헐리우드의 모방에만 머무르고 있고, 다양성을 보장하자면서 헐리우드 영화나, 헐리우드 비슷한 영화만 상영하고 있으니 관객들이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론에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한국영화의 성공이 거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는 회의론에 빠지게 한다. ‘실미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쉬리’ 등 역대 흥행작들의 절대다수가 헐리우드 따라잡기에 성공한 작품들이었다. 한국영화의 질부터 높이라는 스크린쿼터제 축소 찬성론자들의 주장은 곧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한국영화의 양적 성장이라는 겉모습과 다른 질적 부실이라는 내용은 곧 한국영화가 경쟁력이 없다는 논리에 이르기 때문이다.
노골적인 모방
충무로가 ‘작은 헐리우드’가 되고 있는 현상은 점차 더 심각해지고 있다. 핵심 아이템을 헐리우드에서 그대로 따오는 영화도 너무 많다. ‘이대로 죽을순 없다’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를 ‘소년, 천국에 가다’는 ‘빅’을 심하게 연상시켰지만 문제제기조차 별로 없었다.
블록버스터들은 아예 대놓고 헐리우드 같은 영화를 만들겠다고 자랑처럼 떠든다. 최근 개봉한 ‘태풍’의 경우 캐릭터부터 카메라의 움직임, 화면 구도 등 전체적으로 헐리우드 액션물을 최소한의 재창조 과정도 생략하고 모방한 인상이 강하다. 그것도 헐리우드를 넘어서기는커녕 B급 헐리우드 액션물을 한국배우가 연기하고 지명을 한국으로 바꾸는 수준에 그친다. 과연 헐리우드를 흉내 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그만이지, 헐리우드 스타일을 제대로 만드는 한국영화가 필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한국영화가 필요한 본질은 한국적 상황과 정서를 한국영화만이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헐리우드에 대한 콤플렉스가 만들어낸 비극인지, 관객 정서가 헐리우드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우선원인을 따지기는 어렵지만 이 같은 풍조는 적어도 다양성만큼은 심하게 훼손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헐리우드를 모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없다고 해도 창조성이 부족한 풍토에 양적 성장만으로 주권을 사수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고 질적 성장은 더욱 요원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 암담한 것은 한국영화에 대해 관대한 평론가와 언론의 태도다. 영화 저널리즘이 영화와 함께 극도로 산업화되고 애국심마저 함께 작용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한 평가는 확실히 호의적이고 이와 함께 창조성 부재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개봉작들의 전형성
최근 개봉한 ‘흡혈형사 나도열’은 헐리우드의 그늘에서 허우적대는 한국영화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경우다. 흡혈귀라는 정통 서구 캐릭터를 차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헐리우드 장르영화의 문법을 안일하게 답습하는 영화 형식이 문제다. 영화 홍보물에는 지극히 미국적 장르인 히어로물을 ‘한국 최초’로 도입했다고 적혀 있는데 도대체 이것이 자랑인지 한숨만 나온다. 오히려 ‘배트맨’ ‘신시티’ ‘스파이더 맨’ 등의 미국 히어로물들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흡혈형사 나도열’은 아무런 한국적 성찰도, 히어로물의 새로운 진화도 없이 그저 남의 것을 흥행성에 맞춰 짜깁기 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런 영화들이 이윤을 곧잘 내고 있고, 따라서 모방의 안일함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상영중인 ‘홀리데이’ 또한 소재는 1980년대 한국의 현실과 실화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의 구조는 지극히 헐리우드 적이다. 헐리우드 키드들의 머릿속에나 존재할만한 형사 캐릭터만으로도 실소를 자아내는데 그가 주인공을 악착같이 뒤쫓는다는 구조는 헐리우드보다 더 헐리우드적이다.
2월말 개봉예정인 ‘손님은 왕이다’는 최근 한국영화의 경향에서 약간은 색다른 느낌을 지녔다. 하지만 이 영화도 헐리우드 고전 느와르 형식을 넘어서는 정서나 감각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물론 상업영화의 기본적인 틀은 헐리우드가 대부분 만들어 놓은 것이 사실이고 이것을 배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배제할 필요도 없다. 다양한 문화적 양식들이 혼용 속에서 지역적 문화의 특색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주류 한국영화는 명품 디자인 모방하는 ‘짝퉁’처럼 창조적 노력이나 현실적인 성찰이라는 진정성에서 점차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더구나 오리지날이 명품도 아니다. 홍콩영화의 길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우려 속에서 스크린쿼터 축소라는 악재까지 겹친 한국영화가 앞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진정한 다양성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