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는 한동안 여성 판타지가 지배했다. 다니엘 헤니와 현빈이라는 ‘왕자’들이 삼순이라는 막무가내 여자를 사랑했고, 영화 ‘왕의 남자’는 다분히 여성 취향적인 ‘예쁜 남자’ 신드롬을 다시 한번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이 바닥’은 돌고 도는 법. 말랑말랑한 드라마에 질릴 때쯤, 땀 냄새 물씬 나는 선 굵은 남성들의 이야기가 줄을 잇고 있다.
삼국시대 건국신화 안방극장 줄이어
5월15일 첫방송 한 MBC 사극 ‘주몽’은 오랜만에 등장한 본격 남성 드라마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일대기를 그린 이 드라마는 강한 남성성과 웅장한 스케일로 남성 시청자를 사로잡고 있다. 시청률 또한 첫 회 방송에서 14.9%(AGB닐슨자료)로 월화 드라마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다. 특히 30대 남성 시청률은 타 방송사 드라마에 비해 두 배에 가까운 압도적인 수치다.
건국 신화가 항상 그렇듯 주몽은 억압과 폭정을 이겨내고 성공하는 남성적 이데올로기에 부합되는 영웅인 것이 드라마의 성공 요인으로 분석된다. 해모수. 금와, 양정 등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들이 대거 포진된 것 또한 남성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요소다.
안방극장에서 남성 영웅담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6월엔 에스비에스 50부작 ‘연개소문’, 8월엔 한국방송 100부작 ‘대조영’이 펼쳐진다. 광개토대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김종학 프로덕션의 ‘태왕사신기’도 제작 중이다. 모두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또한 특징이다. 사극은 현대 남성들이 ‘상실’했다고 믿는 원초적 남성상을 표현해내는데 적합한 배경인데 개척기인 삼국시대가 특히 남성 판타지를 그려내기엔 효율적이다.
느와르 접전
스크린은 거친 남성들의 숨결이 더욱 많이 쏟아지고 있다. 작년 남성영화를 표방한 ‘야수’와 ‘태풍’에 이어 올해엔 그 수가 대폭 늘어 ‘남자들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사극이 남성 영웅담의 터전이라면 영화에서는 느와르라 할 것이다. 때문에 올해 충무로에는 느와르가 유독 많기도 하다.
지난 4월말 개봉한 황정민, 류승범 주연의 ‘사생결단’은 2006년 남성영화 붐의 포문을 연 작품이다. 이 영화는 남성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여성관객층의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고적인 정서로 중 장년층을 아우름으로써 장르적 한계를 극복하고 흥행몰이 중이다.
5월25일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짝패’ 또한 느와르이자 액션인 전형적인 남성 장르물이다. 이 영화도 거친 남성 액션에 목마른 관객들에게 기대감을 안겨주고 있다. 6월 개봉예정인 조민호 감독의 ‘강적’과 유하 감독의 신작 ‘비열한 거리’ 또한 한국형 ‘조폭 느와르’를 표방하고 있다. ‘휴먼 느와르’라는 새로운 장르도 나섰다. 8월 개봉하는 ‘열혈남아’는 조직과 복수라는 드라마 속에 잊고 지낸 온 가족에 대한 정을 일깨우는 인간적인 내용이다. 장진 감독의 ‘거룩한 계보’는 냉혹한 복수극과 장진 식 코미디를 조합한 새로운 남성영화를 표방하고 있다.
무조건 스타급 투톱
이들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력을 담보로한 스타급 남자 배우를 투톱으로 내세우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최근 제작비가 상승하면서 상업적인 틀 안에서 보다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대립되는 캐릭터의 배치를 통해 극적 재미를 살리고, 영화 내 외적으로 투톱 배우에게서 오는 시너지 효과를 노린 것이다.
‘사생결단’이 황정민 류승범을 출연시켜 눈길을 사로잡았고, ‘강적’은 박중훈 천정명을, ‘비열한 거리’는 조인성, 남궁민을 내세우고 있다. ‘열혈남아’ 또한 설경구, 조한선이라는 남성적 배우를 캐스팅했다. ‘거룩한 계보’는 정재영, 정준호가 투톱으로 출연한다.
더욱 주목할만한 특징은 최근 남성 영화는 의리와 주먹으로 대변되는 남자들만의 로망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변형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일단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의리’ 보다는 ‘배신’이 주요 코드라는 점. 영화 속 남성의 세계는 배신과 복수로 얼룩진 처절한 생존 공간이다. 가족이나 우정 등의 새로운 코드를 넣어 여성 관객들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도 보인다. 여성 캐릭터의 진보 또한 올해 남성 영화의 큰 변화다. ‘사생결단’에서 두 남자 주인공을 비롯한 모든 남성 캐릭터들은 이익관계와 배신으로 엉켜 있다. 이 속에서 유일하게 의리를 지키는 인물은 여성 캐릭터다. 남성 판타지를 생산하면서도 의도적 변형으로 현실성을 부여한 것이다.
드라마 ‘주몽’에서 여성 인물도 비교적 적극적으로 그려졌다. 최완규 작가의 전작인 ‘허준’이나 ‘상도’는 예쁘고 착한 순정파이자 조력자인 여성들이 등장해 남성 판타지를 충적시켜줬지만 주몽과 연인이 될 소서노는 주체적이고 정치적이기까지 한 여성이다.
마초이즘은 향수?
하지만 이 같은 변화 속에서도 영화적 정서는 과거에 머물고 있다. 의리와 공동체라는 판타지는 잘라내더라도 폭력적 세계에 대한 향수는 지키기 위한 요령으로 보인다. 상영중이거나 개봉 대기중인 충무로의 남성 영화들의 정서적 공통점을 한 마디로 말하면 홍콩 느와르적이라 할 수 있다. 이미 개봉한 ‘사생결단’은 홍콩 느와르와 야쿠자 영화에서 남성적 로망을 차용했으며, ‘짝패’ 또한 남성적 시대가 여전히 유효했던 1980년대 이전의 남성영화들에 대한 오마쥬로 가득하다. 개봉 예정인 영화들이 어떻게 한국형 느와르를 실현할지는 미지수지만 시놉시스나 예고편을 봤을 때는 홍콩 느와르를 연상시키는 경우가 많다. 비록 최근 영화들은 현재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친구’에서 비롯된 1990년대의 복고적 조폭 영화와는 차별점을 두고 있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기는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것도 과거의 남성 영화들에서 남성 판타지를 빌려오고 있으니 마치 마초적 세계는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신화 같다. 하긴 드라마는 아예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신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만큼 마초이즘은 향수이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