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온 나라를 뒤덮었던 빨간 물결을 기억하는가. 붉은 악마를 상징하는 ‘비더레즈’(Be the Reads!) 빨간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 안에 가득 메운 관중이 하나가 되어 ‘우리는 하나다’라는 슬로건을 만들고 ‘오~필승 코리아’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 때의 뜨거운 감동과 영광은 4년이 지난 2006년 오늘도 계속된다.
아니, 한층 업그레이드 된 형국이다. 가는 곳, 보는 것마다 독일 월드컵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고, 월드컵을 빼놓고 얘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과히 ‘월드컵 공화국’이라 할 정도다. 조금 오버해서 말해서,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의 월드컵에 대한 다소 광기(狂氣)어리다 싶을 정도의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축구를 저처럼 좋아하고,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월드컵의 힘
실제로 영국 BBC 방송 인터넷 판은 지난달 24일 “한국은 2002년 월드컵 이전까지 해외 축구리그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국민의 관심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야구선수들에게만 쏠려 있었다”면서 “그러나 한국 축구는 여전히 자국의 프로축구는 발전하지 못했고 관중도 없다. 한국에서 축구는 오직 대표팀으로 시작해서 대표팀으로 끝난다”고 지적했다.
분명한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생겨난 우리만의 독특한 하나의 스포츠 응원 문화라는 점이다. 당시의 하나 된 모습은 전 세계의 언론에 집중 조명됐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감동’ 그 자체로 기억된다. 이제 신문과 방송 등 미디어는 물론 월드컵 마니아湧?2002년의 영광을 재현하자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집단주의적 월드컵 응원 속에서, 평소 월드컵은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없었던 이들조차 한데 엉켜 빨간 티셔츠를 입고 평가전 경기가 있을 때마다 요란한 치장을 하고는 광화문 네거리로 나간다. 경기가 있을 때 함께 동참하지 않으면 마치 ‘배신자’이거나, 혹은 이상한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분위기는 몰아간다. 이것이 월드컵의 힘이기도 하다.
월드컵은 스포츠다. 고로 선택의 자유가 있고 즐길 자유가 있다. 분명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만,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이들에겐 선택의 자유가 없다. 보고 싶지 않아도 듣고 싶지 않아도 온통 사방천지가 ‘월드컵’이다.
우리에게 ‘월드컵=애국주의’로 정리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애국주의, 민족주의는 알고 보면 ‘승리’가 동반될 때 이다. 2002년의 뜨거웠던 감동도 4강 신화가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생각해 본다. 당시 열렬한 응원 속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 중엔 “한국이 개최국이기 때문에 유리한 판정을 했던 적이 많았다”는 말을 쓴웃음을 지으며 하곤 했다. 다소 편파적인 판정이 있다손 치더라도 ‘한국팀’이기에 무조건 이기면 된다는 심리가 작용했던 것이다.
얼마 전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 당시 축구 대표팀 관계자는 한 뉴스방송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우리 응원단이 상대팀과 선수에게 야유를 퍼붓거나 하면 아무래도 심판들이 그 여세에 기가 꺾여 ‘정말 잘못 판정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냐”며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월드컵 열기에 숨어 있는 상업주의
박지성은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해 한국 사람들의 왜곡된 월드컵 축구 열기를 꼬집기도 했다.
용광로 같은 월드컵 열기는 선수들의 작은 실수에도 들썩거린다. 축구를 즐기지 않고 ‘승리’에 연연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23일 세네갈과의 평가전에서 ‘역주행’이라며 설기현 선수에게 비난하던 목소리는 5월 26일 보스니아전에서 선취골을 뽑아내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180도 바뀌어 “역시 설기현”이라며 추켜세웠다. 그간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설기현은 그러나, 그날 씁쓸한 표정으로 골 세레머니를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의 월드컵 열풍은 단지 ‘축구’가 좋아서는 아니다. 민족주의를 발판으로 한 세계에서 가장 관심이 높은 운동경기이기 때문이며, 그곳에서 대표팀 축구 스타가 뛰기 때문이다. 월드컵을 한 달 앞둔 지난 5월9일은 프로축구 리그인 K리그의 전기리그가 끝나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기는 알게 모르게 지나갔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월드컵 뿐이었고, 스포츠 신문은 이날의 경기를 단신 정도로 소개했다.
축구를 즐기지 않고 승리만을 즐기는 경우 축구는 쉽게 감정적 민족주의를 증폭시키는 수단으로 전락되기도 한다. 엘살바도르의 축구 대표님이 온두라스 대표팀을 몇 차례 꺾으면서 밀어난 전쟁이 대표적이다. 두 나라의 군사정권은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축구전쟁을 일으켰다.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할 월드컵은 상업주의로 물들고 있다. 언론과 광고 등에서 월드컵에 열광하라고 부채질을 할 때 그 뒤에서는 엄청난 돈이 오고간다. 한국의 방송 3사가 FIFA에 제공한 방송권만 해도 총 850억 정도다. 결국 이 비용은 월드컵을 보기 위해 TV 앞으로 몰려든 축구팬들이 지불하게 된다. 도무지 업종을 불문하고 월드컵 광고가 아닌 것을 찾기가 힘들 정도다. TV광고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월드컵 광고 퍼레이드를 내보내고 있고 거리의 간판, 인터넷 홍보까지 월드컵 홍수 속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월드컵에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심각성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앞서 서울시민의 광장인 서울광장과 청계광장을 서울시는 월드컵 기간 동안 SKT컨소시엄에 사용권을 팔아넘겨 상업성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최근 짝퉁 붉은악마 티셔츠 적발 건은 즐거워야 할 월드컵이 ‘짜증’으로 바뀌게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치르면서 축구에 대한 사람들의 순수한 열광을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붉은 악마는, 그러나 그 운영경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순수한 목적을 버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당시 2천만장이 팔리며 노점상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줬던 ‘비더레즈’ 티셔츠는 이제 붉은 악마의 정식 계약을 맺는 한 의류업체의 1만9,900원짜리 정품 티셔츠로 팔리게 될 전망이다.
2002년 SKT 등 5개사의 후원을 받았고, 2006년 KTF 등 3개사의 후원을 받고 있다. 붉은 악마는 “후원금은 운영비 등 공적인 일에 사용될 뿐이며 남는 돈은 모두 축구발전기금으로 낸다”고 밝히고 있으나, 붉은 악마의 순수함에 열광했던 축구팬들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붉은악마의 응원가가 담긴 버즈의 ‘레즈고투게더’는 후원사인 KTF 이통사에서 발매했고, ‘오~필승 코리아’로 대표적인 월드컵 가수가 된 윤도현 밴드는 애국가 록버젼으로 SK텔레콤 광고를 통해 발매해 월드컵 송으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