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같은 놈’이라는 말은 탐욕스럽고 우둔한 사람을 빗댄 욕이다. 그에 반해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번창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돼지꿈을 꾸면 복권을 사기도 한다. 올해는 더구나 황금돼지해라 영특한 아이를 낳게 된다는 속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도움으로 돼지해 띠풀이를 알아봤다.
시간과 방향을 지키는 시간신이자 방위신
사람은 태어나면서 십이지 동물을 하나씩 부여받게 되고, 그 띠 동물에 따라 운명을 점쳤다. 이러한 띠 동물은 각각의 방위와 시간을 상징하는데, 신라 시대 이후 주로 무덤 둘레돌[護石]이나 뼈묻거리[副葬品]에 나타났다. 돼지해는 육십갑자에서 을해(乙亥), 정해(丁亥), 기해(己亥), 신해(辛亥), 계해(癸亥) 등 다섯 번 든다. 돼지(亥)는 12지의 열두 번째 동물이다. 해시(亥時)는 오후 9시에서 11시, 해월(亥月)로는 음력 10월이며, 해방(亥方)은 북서북(北西北)에 해당하는 시간과 방향을 지키는 시간신(時間神)이자 방위신(方位神)에 해당한다.
돼지는 친근한 동물인 만큼 관련 민속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2천년 전에 돼지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돼지는 신화에서 신통력을 지닌 동물, 제의의 희생, 길상으로 재산이나 복의 근원, 집안의 재산을 상징한다. 그런 반면에 속담에서 대부분 탐욕스럽고 더럽고 게으르며 우둔한 동물로 묘사되는 모순적 양가성을 지닌 띠동물이다.
제물로 쓰는 풍속, 고구려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돝’, ‘도야지’로 불리었던 돼지는 예로부터 양식으로써 가축과 사냥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신라 무덤에는 내세의 양식을 위해 돼지 형태의 토우를 만들어 함께 묻기도 했고, 낙랑에서는 죽은 자의 손에 옥으로 만든 돼지를 쥐게 했다.
가축으로서의 돼지의 용도는 고기와 지방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한 신성한 제물이었다. 돼지는 일찍부터 제전의 희생으로 쓰여진 동물이다. 제전에서 돼지를 쓰는 풍속은 멀리 고구려시대부터 오늘날까지도 전승되는 역사 깊은 민속이다. 고구려 때는 하늘에 제물로 바치는 돼지를 교시(郊豕)라고 해서 특별히 관리를 두어 길렀고, 고려 때는 왕건의 조부 작제건이 서해용왕에게서 돼지를 선물 받았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멧돼지를 납향(臘享)의 제물로 썼다. 오늘날 무당의 큰 굿이나 집안의 고사, 마을 공동체 신앙에서도 돼지를 희생으로 쓰고 있다. 돼지는 이처럼 제전에서 신성한 제물이었기 때문에 돼지 자체가 신통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구려나 고려에서는 수도를 정하는 길잡이 역할도 했고, 소설 ‘서유기’에서 손오공, 사오정과 함께 삼장법사를 수행했던 저팔계는 궁궐이나 사찰을 지키는 추녀마루의 세 번째 잡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고구려 유리왕은 도망가는 돼지를 뒤쫓다가 국내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산수가 깊고 험한 것을 보고 나라의 도읍을 옮겼다. 고구려 산상왕은 아들이 없었는데, 달아나는 교시를 쫓아 가다가 한 처녀의 도움으로 돼지를 붙잡고, 그 처녀와 관계해 아들을 낳았다. 부여에서도 돼지가 벼슬이름으로 있다. 이처럼 고구려와 고려는 돼지의 도움으로 도읍지를 발견하고 왕의 후손을 얻었다. 이는 돼지 자체에 신통력이 있고, 돼지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물인 동시에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의 모습의 신통력을 지닌다. 이러한 관념은 다시 돼지를 상서로운 길상의 동물로 표출한다. 우리의 고대 출토유물, 문헌이나 고전문학에서 돼지는 상서로운 징조로 많이 나타난다. 민속에서는 돼지는 재산이나 복의 근원이며, 집안의 수호신이라는 관념이 강화된다. 돼지꿈이 길몽으로 해석하고, 장사꾼들이 정월 상해일에 문을 열며 돼지그림을 부적처럼 거는 풍속 등은 모두 이러한 관념에서 연유한 것이다.
돈(豚) 발음이 돈(錢) 발음과 유사
돼지는 예로부터 새끼를 많이 낳아 재산을 늘리는 가축의 하나로 여겨졌다. 또한 돼지 돈(豚)의 발음이 ‘돈(錢)’의 발음과 유사해, 오늘날에도 사업 번창을 위해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거나, 돼지그림을 걸어두고 재복이 들어오길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모으라는 저축의 의미로 돼지저금통을 주거나, 돼지꿈을 꾸면 으레 행운의 복권을 산다. 이처럼 우리에게 재복을 주는 동물로 인식되는 돼지꿈을 꿀 수 있게, 어미 돼지 주변으로 몰려드는 새끼 돼지들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도 하고 꿀꿀거리는 돼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이런 긍정적 이미지와는 달리 돼지는 탐욕스럽고, 더럽고, 게으르며, 우둔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설화에는 돼지가 탐욕스러운 지하국의 괴물로 등장한다. 속담에서는 돼지의 탐욕스러운 성정 즉, 욕심, 지저분함, 돼지의 목청, 어리석음, 게으른 성격을 비유하는 사례가 많다. 이러한 부정적 관념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 성서에서는 종교적 금기, 악마의 의도와 유혹의 상징으로까지 진전된다.
하지만 우리 민속에서 돼지는 대체적으로 희망적인 동물로 인식된다. 하지만 황금돼지라는 속설은 이미 알려졌듯 상술에 불과한 근거 없는 낭설이다. 돼지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로운데 황금이라는 이름까지 덧붙일 필요가 있겠는가. 복덩이 돼지해 희망을 걸고 밝은 새해를 열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