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 사는 것을 은혜롭게 생각하자
태풍의
상처를 딛고 추석 명절을 맞아 1천만 교통인파 속에 묻혀 고향을 다녀왔다. 곳곳에 교통체증에 시달리고 상처를 받은 모습을 보면서도 고향의
품은 몹시 푸근했다. 치솟은 과일 값 속에서도 정성을 담은 차례 상 앞에 나누는 덕담은 정녕 훈훈했다.
우리 민족은 5천년 동안 이곳 한반도에서 숱한 눈물과 애환을 겪어왔다. 불과 7∼8년 전에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연이어 무너졌다.
교통지옥에 허덕이고 환경오염에 시달리며 고기에 양잿물을 섞고 불량식품을 파는 사례도 많다. 정치인은 불신을 받고 공무원은 뇌물을 받으며
기업인은 구조조정이라는 빌미로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특히 IMF사태를 맞아서는 한국에 살고 싶지 않았다.
필자도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딸아이 오른 쪽 팔꿈치 생장판 70%가 파괴되는 사고를 당했을 때 한때 이민을 결심했다. 가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캐나다를 찾았다. 미국 LA를 거쳐 밴쿠버에 갔을 때 한 교민의 집에 민박을 했다. 그 교민은 부산 군수기지에서
근무했던 예비역 육군대령이었다. 복잡한 사연으로 60년대에 정착했다고 했다. 그는 컬럼비아 강변 언덕에 꽃피는 아름다운 집에 살았다. 자녀들은
명문대학에 다녔고 생활도 여유로와 보였다. 얼른 보기 남부럽지 않아 보였다.
그 분과 공원에서 조깅을 하고 허드슨만을 드라이브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한가지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그 곳 밴쿠버에는 인도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돈을 벌어 여유롭게 사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히 인도사람’이라고 했다. 바로 그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이 미국에 살든 일본에 살든 한국사람이다. 필자가 일본 큐슈와 대마도 취재를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찬 서리 비바람에도 고향인
북쪽을 바라보는 이름 모를 묘소가 많았다.
캐나다의 교민은 내게 조언을 했다. 당신은 명문대학도 다녔고 훌륭한 신문에서 기자 생활도 했으니 한국에 돌아가 고국을 위해 사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분의 말에 필자는 크게 각성을 했다. 그래 ‘한국으로 돌아가자’라고. ‘어려움을 정면으로 맞서자’면서.
그래서 창설한 것이 ‘은혜로운 서울의 모임(은서회)’이다. 은서회는 수년동안 ‘불우이웃돕기 선양 활동’을 해왔다. 은서포럼을 열었고 모임을
하고 남은 돈은 그때그때 불우이웃돕기를 해왔다. 올해 태풍피해를 당했을 때도 언론사를 통해 수재의연금을 냈다. 이제 우리는 서울보다는 우리
나라에 사는 것을 ‘매우 은혜롭게 생각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는 할 일이 많다. 우선 남북한이 대치 상태다. 북한은 믿기가 매우
어렵다. 김일성-정일 체제는 60년 가까이 버티고 있다. 전쟁과 테러를 수시로 자행했다.
우리 나라는 인구도 많다. 사람이 많으니 사고도 많고 할 일도 많다. 교육문제도 큰 골칫 거리이고 먹고사는 일도 숙제다. 우리 나라는 자원이
빈곤한 나라다. 무역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역거래는 외교통상문제부터 시작된다. 적자가 누적돼서도 안 된다. 한푼이라도 남아야 살아간다.
그래야 기름을 사고 가스와 철광석을 산다. 외환의 공백과 적자를 메울 수가 있다.
외교의 문제도 심각하다. 남북외교를 포함해 미국·일본·중국·러시아 외교도 잘못이 많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문제가 많기에 한국에 살만하다.
할 일이 많기에 즐거움이 있다. 우리 나라는 올림픽과 월드컵 4강에 오를만한 잠재력이 있다. 사람에 대한 자질이 뛰어나고 감각도 뛰어나다.
정이 있고 뜨거운 열정이 있으며 응집력과 눈물이 있다.
우리는 21세기에 이어갈 꿈과 비전이 도사리고 있다. 한번 힘을 합쳐보자. 을지문덕이나 이순신 장군이 천군만마를 물리칠 때처럼 ‘대∼한
민국’을 외치며 목놓아 울어 제칠만한 용기와 능력이 있다.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나라에, 이곳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고 은혜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