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강민재 기자] 광복절을 앞두고 금융권에도 이른바 '애국마케팅' 붐이 일었다.
그중 우리은행이 가장 돋보였다.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대한민국 정통은행"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애국은행'의 대표주자처럼 활발한 마케팅을 벌였다.
◇ 민족은행 가면 속 친일 민낯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갈수록 거세지는 상황은 우리은행처럼 '민족 정통성'을 표방해 온 은행에겐 더 없이 좋은 기회임에 틀림없었다.
광복 74주년을 기념해 8일 출시한 '우리 특판 정기예금'은 만기 해지 시 연 0.8%포인트의 우대금리 적용으로 최고 1.7%의 금리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최소 가입금액은 개인당 100만 원으로 3,000억 원 한도 내에서 선착순 마감한다고 했다.
독립군의 항쟁을 다룬 영화 <봉오동전투> 관람권 증정 이벤트도 벌였다. 신용대출을 신규 약정하거나 문자메시지, 이메일 등을 통한 마케팅에 최초 동의한 고객을 대상으로 1,899명을 추첨했다.
'1899'라는 숫자는 우리은행의 모태인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이 설립된 연도다.
우리은행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은행'이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 (조흥은행의 전신)이 국내 최초다. 조흥은행이 신한금융지주에 흡수되면서 우리은행은 '현존하는 최고(最古) 민족은행'이란 타이틀은 얻은 셈이다.
◇ "민족은행" 주장 '어폐'
하지만 '민족은행'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순수 민족 자본으로 설립된 은행이라 보기 힘든 면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천일은행은 고종이 설립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친일파 민병석이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초대행장을 맡았다.
당시 일본 다이이치은행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이후 대한천일은행의 행보는 더욱더 민족적이지 않다. 아니 '반(反)민족적'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대한천일은행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2월 조선상업은행으로 개편된다. 일제강점 직후 민족계 은행에 대한 일본 자본과 세력을 침투시키려는 조선총독부 정책의 일환이었다.
◇ 삼남, 북선상업, 대구상공 등 민족계 은행 흡수
조선상업은행 출범 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식민지 금융 찬탈에 나섰다. 조선총독부는 1928년 신은행령을 공포하고 민족계 은행 말살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28년 삼남(三南)은행이, 1933년 북선상업(北鮮商業)은행이, 1941년 경일은행의 전신인 대구상공(大邱商工)은행이 흡수, 통합되었다.
우리은행이 역사에서 정통성을 찾으려면 영예만 볼 것이 아니라 치욕의 역사도 함께 보아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우리은행이 영욕(榮辱)을 알면 애국을 한낱 마케팅 수단으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시사뉴스> 이번호 커버스토리에서 다룬 것처럼 애국마케팅이 대국민가면쇼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