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택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남도립미술관(관장 박금숙)이 《유택렬과 흑백다방 친구들》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는 경남의 1세대 추상화가인 유택렬의 예술세계 전반을 재조명하는 한편, 그가 운영한 진해 ‘흑백다방’과 교우했던 이중섭, 전혁림 등 ‘친구 예술가들’을 함께 주목하는 것이 특징이다.
경남이 낳은 훌륭한 작가는 많다. 조각 분야에서는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1915~1982)을 비롯해, 문신(1929~1995), 박석원(82), 심문섭(81)이 있고, 회화 부문에는 전혁림(1916~2010)과 유택렬(1924~1999) 등이 있다.
유택렬(劉澤烈)은 경남의 선구적인 추상화가로 알려져 있다. 미술 정규과정을 밟지 않고 오직 독학으로 화업을 전개하며 주로 지역에서 활동했지만, 유택렬의 작업은 1950년대 후반 한국 추상미술의 궤적과 함께한다.
원래 함경남도 북청 출신이다. 박석원(전 홍익대교수)의 스승이기도 한 그는 해방직전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되어 진해에서 복무했다. 이것이 진해와의 첫 인연이다. 해방 후 북청으로 귀향했으나 6.25 전쟁 발발 후 흥남철수작전 때 거제도로 월남했다. 1953년 경남 진해에 정착한 후 진해중학교와 진해고등학교 미술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진해를 중심으로 예술 활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6.25 전쟁 당시 피란 수도 부산을 포함한 경남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귀향하거나 피란을 와 전쟁 중에도 예술 활동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활동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부산과 통영, 마산, 진주, 진해 등지에서 활발하게 이어졌다.
특히, 진해는 일본 강점기 일본이 한국에 만든 최초의 계획도시로 6.25 전후에도 봄이면 벚꽃세상이 되는 아름다운 군항(軍港)이다. 그곳에서 유택렬이 운영했던 클래식 음악다방인 흑백다방은 음악감상실 성격으로, 예술의 중심지이자 사랑방이었다.
이 전시는 유택렬의 예술세계를 오늘의 시각으로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흑백다방을 중심으로 유택렬이 교우한 예술가들의 작품세계 또한 함께 교차해 선보인다.
이산의 한과 아픔 서린 작품 세계
1924년 함경남도 북청군 하거서면에서 태어난 유택렬은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풍요롭게 자랐다. 1937년 하거서소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북청농업학교 재학시절 육촌형 유강열(전 홍익대학교 교수)의 도움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유택렬은 유강열 한묵 이중섭 등과 교류하며 금강산 스케치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내내 1924년 갑자년생의 운명을 한탄했고, 어머니를 두고 월남한 것을 자책하며 그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작가로서는 우리의 근본 혹은 전통과 연계되는 지점을 모색하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한국적 추상’을 일궈내고자 고군분투하였다.
북방 계열의 굵은 선을 가진 그는, 작품에서도 어린 시절 고향에서 경험한 추사체, 부적, 한국의 토속신앙, 샤머니즘 등을 통해 일관되게 ‘선(線)으로써 한국적 추상을 구현’했다.
동서양 미술 기법들을 다양하게 실험한 그는, 돌멘(Dolmen, 고인돌), 암각화, 단청, 살(煞), 제(祭), 부적과 같은 샤머니즘과 불교미술, 원시시대의 조형적 요소들을 활용했다. 원시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징적 표현,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행위의 흔적 속에서 한국미술의 기원이자 한국적 미를 찾고, 그 안에서 한국적 추상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했다.
유택렬 화백이 살던 생활공간(흑백 2층)을 가면 고구려 무용총 벽화 속 인물들을 자개로 작업한 옷장을 볼 수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뿌리, 정신의 고향을 북방 문화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년 시절의 체험, 추사 김정희의 영향
유택렬의 작품은 북청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체험과 환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어린 시절 심한 배앓이 끝에 ‘먹물아바이’로 불리던 노인이 만든 부적 태운 먹물을 마시고 깨끗이 나았던 경험을 했다. ‘부적 태운 물’은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실려있는 처방전이라는데, 이러한 경험은 유택렬이 일찌감치 원시미술과 샤머니즘에서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하는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 그에게 큰 영향을 마친 이는 추사 김정희(1786~1856)였다. 유택렬은 40년여간 지속한 〈부적에서〉 시리즈에서 추사에게 받은 영향을 보여주었다. 작가가 유년 시절을 보낸 북청은 추사가 1851년 유배되어 1년을 보낸 곳으로 마을 곳곳에, 또 집에도 추사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11월 1일 개막식에서 유택렬이 생전에 남긴 ‘기도’라는 시를 낭송하기도 했던 큰 딸 유승아(62. 영국 거주)에 따르면 유택렬의 북청 고향 집에 추사가 쓴 가로 액자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작가의 할아버지가 추사와 교류도 했다고도 한다.
샤머니즘에서 독자적 조형언어 구축
유택렬의 작품은 크게 초기(1956-1960년 초반)와 중기(1961–1970년 중반), 후기(1974-1990년 후반)로 나뉜다.
유택렬이 부적을 소재로 한 유화 작품을 시작한 것은 1961년이다. 선(획)이 강조된 유화 작업에서 〈부적에서〉의 단초를 내보였다. 1974년부터 한지에 먹으로 일필휘지(一筆揮之)와 같이 단숨에 그려낸 형식의 〈부적에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20여년 간 필묵의 맛을 유화로 전환하기 위해 고심했다.
1993년 부인 이경승의 죽음을 전후로 붉은 배경의 〈부적에서〉가 유화 시리즈로 이어졌다. 그에게 〈부적에서〉는 조형성을 넘어 염원이 담긴 부적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1990년대 후반 그린 〈부적에서〉는 황색으로 미완성 작품으로 남아있다.
북방 문화인 고인돌을 소재로 한 〈돌멘 Dolmen〉 시리즈는 1960년 한국적 추상을 모색하던 시기에 시작해 1970년대 중반까지 전개했다. 돌멘의 사각 문양과 선에 옵아트 단색화와 같은 현대미술의 조형적 경향을 대입하는 등 다양한 연구와 실험을 시도했다. 그는 고인돌의 사각 형태에 주목해, 죽은 자를 위한 공간, 삶과 죽음을 잇고, 시공을 연결하는 문을 형상화했다.
1980~90년대 중반에는 원시미술과 불교미술의 조형성을 연구했다. 1990년 초, 선(禪) 사상을 바탕으로 한국적 현대 조형의 길이자 예술로 승화한 무아의 흔적을 위해 유택렬의 예술 여정은 다채로운 선의 중첩으로 귀결된다.
1, 2층 전시실에서 2개의 섹션과 8개 하위 섹션으로 구성됐다. 유택렬의 작품과 아카이브 200여 점 그리고 이중섭, 한묵, 전혁림, 유강열 등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대가들과 김춘수, 김수돈, 정윤주 등 문인과 작곡가의 작품 및 아카이브 70여 점도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다.
같은 장소 〈흑백다다방방〉은 흑백다방의 정신을 이어받아 관람객의 휴식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예술·문화 관련 활동가들이 연극, 시 낭송회, 스터디, 발표회, 회의 등 예술문화 관련 활동 및 행사를 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운영된다.
2층은 유택렬의 전 생애에 걸친 주요 작품들을 <유택렬, 염원의 선線>으로 선보인다. 이는 다시 ▲‘한국적 추상으로 가는 길’ ▲‘그립고 그리운 사람들’ ▲‘돌멘 Dolmen, 시공을 연결하는 문’ ▲‘우리 조형의 본질을 찾아서’ ▲‘부적에서: 무의식의 조형, 본성적 행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음의 평온, 행복의 염원’ ▲‘선禪에서 선線으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택렬의 첫 제자인 박석원(전 홍익대 교수)은 “다시 한번 참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먹그림과 부적 등 독창적인 세계를 찾아서 애를 참 많이 쓰셨다. 특히 추사에 영향을 받은 먹그림은 참 뛰어나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됐다”고 밝혔다.
전시를 기획한 최옥경 학예사는 “이번 전시로 유택렬 화백의 폭넓고 깊이 있는 예술세계를 쉽게 이해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면서, “더불어 1950년대 이후 경남에서 이루어진 활발한 예술 교류의 흔적들을 통해 경남예술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사진 = 경남도립미술관 제공>